▲ 조영훈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오늘)

지역 노동복지센터에서 상담을 하다 보면 아직도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고 일하는 분들을 참 많이 만난다. 식당이나 학원, 건설 현장 등에서 일하는 미조직 노동자들이 이런 분들이다. 근로계약서 없이 일하는 것의 위험성에 대해서는 다들 잘 알고 계신다. “왜 계약서를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셨어요?” 하고 여쭈면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온다. “그러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할 텐데, 어쩌냐!”

노동자가 근로계약서를 교부해 달라고 요구하기는 어렵지만, 사용자가 노동자에게 임금을 적게 받기로 하자는 내용의 임금삭감 동의서나 연차휴가의 공휴일 대체 동의서, 취업규칙 불이익변경 동의서를 내밀며 서명을 요구하는 경우는 또 많다. “왜 그런 문서에 서명을 하셨어요?” 하고 여쭈면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온다. “안 하면 내일부터 나오지 마라고 할 텐데, 어쩌냐!”

심지어 실질은 해고인데 개인사유로 인한 사직서를 쓰고 나가라는 요구를 듣는 경우도 부지기수다. 사장 압박에 사직서를 결국 제출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너무 억울하고 부당해 지역 노동복지센터에 찾아와 하소연하는 경우인데, 이런 경우 이미 제출한 사직서를 회수할 방법은 사실상 거의 없다. “왜 해고인데 사직서를 써 주셨어요?” 하고 여쭈면 다음과 같은 답이 돌아온다. “안 쓰면 집에도 못 가게 할 텐데, 어떻게 안 쓰냐!”

사실 사직서의 경우는 답답한 면이 없지 않아 보이지만, 근로계약서 작성을 요구하기 어려운 것, 사장이 임금저하나 연차휴가 대체 동의서에 서명하라고 요구할 때 거절하기 어려운 것 등은 어느 정도 수긍이 가는 면이 있다.

얼마 전에는 하루 8시간, 주 2회 파트타임 노동을 시작한 아내가 (사장이 퇴직금과 주휴수당 지급을 피하려고) 서류상으로 휴게시간을 늘려서 노동시간을 주 15시간 미만으로 만들어 버린(!) 근로계약서에 멋있게 직접 서명까지 완료한 물건을 집에 가져와, 그걸 내려다보며 같이 쓴웃음을 지은 적이 있다. 아내에게 왜 정당한 근로시간이 적힌 근로계약서를 요구하지 않았냐고 차마 묻지 못했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해당 노동자들이 어리석거나 정신적으로 강단이 없어서가 아니다. 바로 노동자가 사용자와 대등한 입장에 놓여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부는 이 같은 힘의 불균형 상태를 해소하기 위해 국가가 제3자 보증인 입장에서 법률로 최저기준을 설정하고 이 기준 이상으로 ‘계약’이 체결·이행되도록 강제하기 위해 근로감독행정을 펼치고 있다.

지난해 7월 국회 교섭단체 대표연설에서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는 “근로기준법의 시대는 저물어 가고 있다”며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해 주는 ‘기준’의 시대에서 경제주체가 자율적으로 맺는 ‘계약’의 시대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노동 현장에서 벌어지는 ‘계약’이란 것이 민법에서 말하는 ‘자유로운 의사의 합치’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것은 노동하는 누구나 피부로 안다.

근로기준법이 있어도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는 힘의 논리에 여전히 좌우된다. 오히려 근로기준법에서 광범위하게 노동자 동의나 근로자대표와의 합의를 유도해 근로기준법이 정한 최저기준을 지키지 않는 것을 용인하고 있어 문제가 되는 경우가 많다.

노동관계법은 노동자와 사용자 관계가 대등하지 않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오늘의 노동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서는 노동자유계약법이 아니라 ‘더 강한’ 근로기준법과 근로감독행정이 필요하다. 물론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최근 발표된 ‘시간외근무는 최저임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고용노동부의 새로운 행정해석을 보며 매우 당혹해하고 있지만….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