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PDATE : 2019.10.13 일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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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복지공단 재해조사, 산재예방 최후보루로 기능해야조애진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 조애진 변호사(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산업재해 소송을 진행하다 보면 재해조사의 부실함을 발견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특히 재해자가 작업공정에서 유해물질을 취급하거나 유해물질에 노출된 적이 있는 경우는 더욱 신중하게 재해조사서를 살펴보게 된다.

파킨슨 증후군 진단을 받은 후 업무관련성을 주장하며 산재신청을 한 노동자(피재자)가 있었다. 그는 의료용 드릴 제조공장에서 생산품을 세척해 단면을 매끈하게 만드는 작업을 수행했는데, 그 과정에서 트리클로로에틸렌(TCE)을 취급했다. 이 유기용제는 산업안전보건법령 등에 규정된 유해물질로, 사람에게 두통·혼수·구토·중추 및 말초신경장해·암 등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따라서 물질을 취급할 때는 안전보건공단에서 정하는 기준에 맞는 보호 장비를 착용해야만 한다.

그러나 그는 연삭된 의료용 드릴을 맨손으로 잡아 트리클로로에틸렌이 담긴 용기에 넣고 흔들어 세척한 후 손과 제품에 묻은 물질은 걸레로 닦아 내거나 입으로 불어 제거했다고 했다. 물질의 위험성에 대해 사업주에게 교육받지 않았냐고 물어봤더니 오히려 사업주가 그와 같은 방법으로 시범을 보이기에 자신도 똑같이 따라 한 것이라 했다. 재해조사서를 살펴보니 상시근로자 11명 정도의 사업장 규모에, 피재자와 같은 방식으로 작업하는 노동자는 9명이었다. 사업주는 재해조사 과정에서 피재자에게 장갑과 마스크를 제공하고 환기설비도 갖췄다고 의견을 제출했지만, 조사자료 어디에도 환기설비나 보호장비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전문조사 필요성에 관해서는 유기용제 노출력이 4개월밖에 되지 않아 업무관련성 전문조사는 불필요하다는 자문소견이 기재돼 있을 뿐이었다.

결국 불승인 처분을 받은 노동자는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소를 제기하고 증거확보를 위해 문서제출명령을 신청했다. 이에 재판부는 사업주에게 작업환경측정보고서와 환기설비·보호장비 사진을 제출하라고 명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아 사업주는 명령받은 자료를 당당히 법원에 제출했다. 내용을 살펴보니 “피재자가 근무할 당시에 당사가 작업환경측정 의무 대상인지 몰랐습니다. 그로 인해 작업환경 측정을 하지 않았기에 작업환경측정보고서는 제출할 수 없습니다”라는 답변과 더불어 미세먼지도 차단할 수 없을 것 같은 일회용 종이재질의 마스크와 급식실에서 흔히 사용하는 고무장갑, 천장에 설치된 환풍구 사진이 제출돼 있었다. 한 치의 거짓과 꾸밈없는 날것을 접하고 보니 탄식이 절로 나왔다. 어쩌면 사업주도 물질의 위험성을 제대로 알지 못해 노동자와 유사한 방식으로 유해물질에 노출됐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유해물질 취급과 노출이 문제되는 사건에서 노동자가 산재신청을 하면 근로복지공단은 각 지사에서 재해조사를 실시한다. 다만 작업환경측정·분석이 필요한 질병, 유해요인조사가 필요한 질병 등은 안전보건공단이나 작업환경측정기관에 업무관련성 전문조사를 의뢰하도록 돼 있다. 그런데 전문조사가 필요한지 여부도 재해조사 결과를 토대로 자문의사가 판단하는 구조이므로 재해조사가 얼마나 충실하게 이뤄지는지가 사건 전체의 향배를 좌우할 만큼 중요하다.

이 사건처럼 피재자가 보호장비를 미착용하거나 효과 없는 장비를 착용함으로써 단기간 유해물질에 무방비로 노출됐다면, 그의 작업력이 길고 짧음을 떠나 함께 일하던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위해서라도 전문조사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 사업주가 제출한 의견과 실제 작업환경이 다르다거나, 사업주의 안전보건조치가 부적합·불충분한 것으로 밝혀졌다면 상병 진단의 전제사실이 달라지므로 경우에 따라서는 진단을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결국 부실한 재해조사는 최종 처분이 내려지기 전 과정에 연쇄적으로 악영향을 미쳐 위법·부당한 처분에 이르고 만다.

처분 결과를 다투는 방법으로 행정심판 절차가 있지만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한 심사청구에서 재조사가 이뤄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며, 서면조사를 원칙으로 하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에서는 현장조사가 거의 이뤄지지 않으므로 행정심판 단계에서 재해조사 결과를 정정하기란 매우 어렵다. 행정심판 절차를 통해서 밝힐 수 없었던 사실들이 소송단계에서 비로소 민낯을 드러내는 경우가 있지만 이마저도 아주 운이 좋은 경우에만 그렇고, 대체로는 시간의 경과에 따라 증거가 소실돼 버릴 가능성이 크다.

소송에서의 승패와는 무관하게 부적합한 보호장비를 착용한 채 피재자와 함께 작업을 했던, 그리고 지금도 그 작업을 하고 있을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이 가장 걱정된다. 소송 과정에서 사업주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사실이 발견됐다 한들 당장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할 방법은 없다. 반면 재해조사 과정에서 작업공정의 유해요인이 포착됐다면, 업무관련성 전문조사를 통해 즉시 위험요인을 제거하고 안전조치를 도모할 수 있다. 제재와는 별개의 예방조치인 것이다. 특히 사업주조차 작업장 유해요인을 잘 알지 못하는, 규모가 영세한 사업장일수록 전문조사를 통한 유해요인 발견은 소속 노동자들의 직업병 예방에 유효적절한 수단이 될 수 있다.

예방은 안전보건공단이, 보상은 근로복지공단이 각기 분리해 담당하는 상황에서 재해조사는 당해 피재자의 산재신청 사건 처리를 넘어, 같은 작업환경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안전과 건강을 지키기 위한 산재예방의 최후보루로 기능할 수 있어야 한다.

조애진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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