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나래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

6월26일은 유엔이 정한 고문 생존자 지원의 날이다. 잘 알려진 날은 아니지만, 엄연히 이들은 국가폭력의 상처를 입은 피해자이자 생존자로서 잊을 수 없는 역사로 존재한다. 1998년 이날을 지정한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은 “오늘은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을 인내해 온 이들에게 우리의 존경을 표하는 날”이라 칭하며 고문 피해자들의 고통을 위로했다. 여러 나라에서 국가폭력 재발을 막기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위로하고 지혜를 모으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70년대와 19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절 중앙정보부와 보안사·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을 당한 끝에 간첩으로 조작된 피해자들이 있다. 이들 가운데 재심재판을 통해 진실을 밝히고,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의 책임을 묻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 주체가 돼 만든 단체가 재단법인 진실의 힘이다. 진실의 힘은 국가폭력에 맞서 인간의 존엄성을 지키는 데 기여한 사람을 대상으로 2011년부터 인권상을 시상하고 있다. 특별히 올해는 인권상 주인공으로 산업재해피해 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선정됐다. 지난달 26일 과거 국가폭력의 상징이었던 중앙정보부·국가안전기획부 공관이기도 했던 남산 문학의 집에서 9회 진실의 힘 인권상 시상식이 열렸다. 상상하기조차 힘든 고통, 그리고 그 고통을 껴안고 현실을 바꿔 내기 위해 나선 산재피해 가족들에게 의미 깊은 상이 수여된 것이다.

고 김동준·고 김동균·고 홍수연·고 이민호·고 이문수·고 이한빛·고 황유미·고 김용균·고 김태규, 그리고 한혜경씨까지. 고교 현장실습생부터 반도체·방송·발전소·건설 등 다양한 일터에서 일하다 죽음에 이른 자식들을 가슴에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가족의 죽음으로 맺어진 또 하나의 가족이 됐다. 산재피해 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결성된 이유는 간명하면서 무게가 있다. 다시는 자신과 같은 산재피해 가족이 나오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느껴진다. 한 해 2천400여명, 매일 6명의 노동자가 일하다 죽는 우리나라 현실을 떠올려 보면 그들의 가족·동료·친구 등 산재로 인한 모두의 피해와 고통은 헤아릴 수조차 없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산재피해 가족들에게 국가는 어떠한 힘도 돼 주지 못했다. 오히려 가족의 죽음이 산재임을 인정받기 위해 외로이 싸워야만 했다. 회사는 당연하게도 그들의 죽음을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심지어 고용노동부와 관계기관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오히려 유족들의 분노를 자아냈다.

제주의 한 생수 제조업체에서 압착기기에 끼이는 사고로 사망한 현장실습생 고 이민호군의 아버지 이상영씨는 시상식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런 상황을 바꾸기 위해 교육부와 노동부에 수없이 항의를 해도 아무런 반응도 없고, 저 자신만 지쳐 갈 뿐이었습니다. 그때 용균이가 죽었습니다. 용균이 사고를 보면서 저는 더 이상 이대로 놔둬선 안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우리 현장실습, 산재피해 가족들이 모여 한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피해 가족들에게 직접 연락도 하고,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는 분들과 얘기도 나누고, 그렇게 해서 ‘다시는’ 가족모임이 만들어졌습니다.”

법원은 올해 1월 이민호군이 숨진 업체 제이크리에이션 대표에게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결과 이 회사는 산업안전과 근로감독 분야에서 680건의 법 위반 사항이 드러났는데도 집행유예에 그친 것이다. 삼성 반도체 산재피해 노동자 한혜경씨의 경우 산재인정을 받는 데에만 10년이 걸렸다. 재신청을 통해 8번 만에, 최초신청 후 10년의 마음 졸이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아파트형 공장 신축 건설현장에서 추락해 숨진 김태규씨 사건의 경우 유가족이 경찰의 조사 결과조차 신뢰할 수 없게 진행되고 있다. 결국 국가가 제 역할과 책임을 방기하는 사이 유가족들이 나설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시상식 자리에 참석한 유가족 어느 누구도 이 상을 받는 것을 감히 ‘기쁘다’ 말할 수 없다며 눈물 흘릴 수밖에 없었다.

지난 1일부터 5일까지 산업안전보건 강조주간 행사가 진행 중이다. 2년 전 문재인 대통령은 이 행사 기념식에서 “산업재해는 한 사람의 노동자만이 아니라 가족과 동료 지역공동체의 삶까지 파괴하는 사회적 재난”이라고 밝혔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최우선 가치는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2년 사이에 산재피해 가족 네트워크 ‘다시는’이 만들어졌다. 28년 만에 개정된 산업안전보건법은 유가족과 노동계로부터 "김용균이 빠진 법"이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이 아이러니한 상황을 문재인 정부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산재피해 가족들의 간절한 바람대로 ‘다시는’ 산재로 노동자가 죽고, 아프고, 다치는 일이 없도록 정부가 노력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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