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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 정신시장전체주의 비판과 사회정의 복원을 위하여

지은이 : 알랭 쉬피오

옮긴이 : 박제성

페이지 : 222쪽

발행일 : 2019년 4월 1일

값 : 16,000원

ISBN : 978-89-97205-47-9(03300)



[책 소개]

「필라델피아 정신」 한국어판(초판) 서문

일차 대전이 끝난 후 국제사회는 국제노동기구(ILO) 헌장 전문을 통해 “항구적 평화는 사회정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역사상 처음으로 인정했다. 이차 대전의 참상 및 나치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의 패망은 그러한 선언이 옳았음을 재확인시켜 줬다. 강자만의 법에 근거한 체제는 언제나 무너지고 만다. 힘은 정의에 복무할 때에만 정치질서의 지속성을 보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차 대전 연합국들이 보기에 이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래서 시장의 폭력을 사회정의에 복무하도록 만드는 새로운 국제 법질서를 세우고자 했던 것이다. 이러한 법사상의 중흥기는 1944년 채택된 필라델피아 선언에서 시작해 1948년 세계인권선언이 채택될 때까지 이어진다.

그러한 노력이 어떤 결실을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되는 두 측면이 존재한다. 한편으로는 서유럽에서 경제성장과 민주주의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던 복지국가 모델의 기초를 확립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처음부터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브레턴우즈 회의에서 케인스가 옹호했던 화폐 개혁안이 좌절된 것이나, 1948년 채택됐지만 끝내 비준에 이르지 못했던 아바나 헌장의 실패 같은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아바나 헌장은 국제무역기구(ITO) 창설을 규정하고 있었는데, 국제무역기구의 임무 가운데 하나는 유엔 헌장에서 정한 목적, 즉 완전고용과 삶의 질 고양이라는 목적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국제무역기구 규약은 △국제수지 적자뿐만 아니라 지나친 흑자도 방지할 것 △국가 간 경쟁이 아니라 경제적 협력을 지원할 것 △국제노동규범 준수를 옹호할 것 △자본 이동을 통제할 것 △생필품의 안정적인 유통을 위해 노력할 것 등을 규정하고 있었다. 한마디로 국제무역기구 의제는 1994년 설립된 세계무역기구(WTO) 의제와는 거의 정반대였다.

실제로 1980년대 이후 사회적 목적과 경제적 수단의 관계는 역전됐다. 다시 힘이, 이번에는 우월한 인종이나 혁명적 계급의 힘이 아니라 시장의 힘이 사람들의 삶과 나라 사이의 관계를 조직하는 최상위 원칙으로 확립됐다. 덕분에 구공산주의 체제는 손쉽게 시장경제로 전향할 수 있었으며, 서구 민주주의 체제는 손쉽게 금융시장 독재로 개종할 수 있었다. 여전히 과거 전체주의 체제에 기반을 두고 있는 북한이나 쿠바 같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면, 오늘날 모든 나라는 시장전체주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다. 시장경제는 금융·환경·사회에 관한 법적 토대 위에 근거한다. 시장이 실제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화폐 가치를 보증하고, 자연을 보호하며, 장기적인 인간의 삶을 보장하는 규칙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시장전체주의는 이 토대를 무너뜨린다. 맹목적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가 초래하게 될 치명적 위험들에 대한 일종의 해독제로 등장한 사회법(노동법+사회보장법)은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달한 서양의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됐다. 그러나 사회법이 제기하는 질문은 이미 오래전부터 더 이상 서양의 전유물이 아니다. 오늘날 좋든 싫든 동일한 경제적 변화로 휩쓸려 가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사회법은 동일한 질문을 제기한다. 중국이 “공산주의시장경제”로 전환한 이후 중국 정치 지도자들이 관심을 갖는 법 분야가 변화해 간 양상이 이를 잘 보여준다. 처음에 그들은 상법을 중국에 도입하는 데에만 관심을 뒀지만, 최근 몇 년 동안에는 열악한 삶의 질과 노동조건으로 인한 폭력과 갈등 증대 및 불평등 심화를 방지하기 위해 최소한의 사회정의를 보장할 수 있는 노동법을 마련하는 데 신경을 쓰고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각각의 나라는 모두가 인정하는 국제사회법을 마련하는 데 기여하는 한편으로 각자의 고유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이처럼 자신의 전통을 현대성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함을 파악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산업혁명 이래 제국주의에 잘 저항했던 나라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예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양 근대성의 일부를 제 것으로 삼을 줄 알았다. 한국은 그중 하나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방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뱃사공 역할이 소중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그러므로 나는 이 작은 책을 번역하기로 한 역자에게 특별히 감사의 뜻을 표한다.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제도 위기에 대한 진단과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 한국어판 출간은 한국의 관점과 더불어 세상을 바라보는 법을 배울 수 있는 행운을 나에게 가져다줄 것으로 믿는다.

2019년 4월

알랭 쉬피오



[출판사 서평]

75년 전 민주주의 르네상스를 꽃피우게 했던 1944년 ILO 필라델피아 선언을 오늘의 시각과 법․제도적 관점으로 되돌아보고 시장의 폭력과 비인간성, 시장전체주의 폐해를 낱낱이 파헤친 2019년 사회정의 지침서!

“항구적 평화는 사회정의 기초 위에서만 가능하다.”(ILO 헌장 전문)

“노동은 상품이 아니다.”(필라델피아 선언 Ⅰ-a)

“일부의 빈곤은 전체의 번영을 위태롭게 한다.”(필라델피아 선언 Ⅰ-c)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제도 위기에 대한 진단과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저자 서문 중에서)

오늘날 “필라델피아 정신”의 자리에는 완전히 반대의 정신이 앉아 있다. 여기에는 영미식의 극단적 자유주의 반혁명과 공산주의 국가들의 시장경제 전환이 이중으로 영향을 미쳤다. 단적 자유주의 반혁명이라는 포괄적 표현은 19세기 프랑스 신왕당파와 마찬가지로, 신화화된 구체제를 복구하고 구체제 이후의 새로운 체제가 남긴 일체의 흔적을 지우려고 했던 레이건과 대처 정부 및 그 후계자들의 정부에 의해 실행에 옮겨진 독트린을 가리킨다.

극단적 자유주의는 경제 영역과 국제 정치 영역에서 동시에 영향력을 행사했다. 경제적 차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는 유럽 대륙에서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함축하는데, 신자유주의는 복지국가를 해체하고 “자생적 시장질서”의 복원을 의도한다. 국제 정치 차원에서 극단적 자유주의는 신보수주의로 번역되는데, 즉 필요한 경우 군사력에 의해 자생적 시장질서를 전 세계로 확산시키고자 하는 복음주의를 말한다.

이 주제에 관해 “혁명” 운운하는 것은 정당하다. 그것은 혁명이라는 말이 법과 제도의 역사 속에서 획득한 의미에서다. 1980년대부터 미국과 영국에서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한 극단적 자유주의는 곧이어 모든 서양 국가로 확산했다. 이차 대전 종전 후 사회적 영역에 도입됐던 개혁 조치들은 이 반혁명의 첫 번째 표적이었다. 이것은 극단적 자유주의의 가장 뛰어난 프랑스 우두머리 중 한 명인 드니 케슬러의 말이 증명하는데, 케슬러는 “프랑스레지스탕스위원회 프로그램을 체계적으로 해체할 것”을 촉구했다.

필라델피아 선언과 같은 정신에 입각해 그보다 두 달 앞서 은밀하게 채택된 프랑스레지스탕스위원회 프로그램은 “사회적 공화국”을 건설하기 위한 대원칙을 담고 있었다. 사회적 공화국은 1946년 프랑스 헌법 전문에서 승인되기에 이른다(여전히 유효하다).

프로그램은 특히 “가장 광범위한 민주주의의 확립, (…) 언론의 자유와 금권에 대한 언론의 자주성, (…) 경제와 금융의 운용에서 중세성을 제거하는 것을 함축하는 진정한 경제적·사회적 민주주의의 복원, (…) 특히 계약적 노동체제의 복원과 개선에 의한 노동권과 휴식권, (…) 사회경제적 삶의 조직에서 광범위한 권한을 향유하는 자주적 노동조합 체제를 그 전통적인 자유 속에서 재구축하기, (…) 노동을 통해 스스로를 부양할 수 없는 모든 시민에게 생존 수단을 보장하기 위해 이해 당사자들과 국가를 대표하는 자들이 경영을 맡는 사회보장제도를 구축하기 위한 완전한 계획”을 담았다.

레지스탕스의 이 사회적 유산을 “체계적으로 해체할 것”을 촉구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지난 삼십여 년 동안 필라델피아 정신에 입각한 모든 텍스트를 향해 전개한 훨씬 광범위한 비판에 비춰 본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니다.

그러한 비판은 현대의 경제적 근본주의 아버지 가운데 한 명인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에 의해 전개됐다. 1974년에 이른바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하이에크는 법학박사이기도 했으며, 그가 쓴 글의 일부는 자신의 경제 이론에 따라 법과 제도를 개혁하는 방안을 꼼꼼하게 서술한 것들이다. 하이에크에 따르면 1948년 세계인권선언에 의해 승인된 사회경제적 권리들은 전통적인 시민법이 지향하는 자유로운 질서를 한순간에 파괴하지 않고서는 구속력 있는 법률로 옮겨질 수 없을 것이다.(1부 거대한 반전, 1장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중에서)

(…)

2008년 가을의 금융시장 붕괴는 좀 더 심각한 위기의 징후일 뿐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법의 위기다. 시장이 적절하게 작동할 수 있으려면 세 가지 차원으로 구성된 제도의 세계에 편입돼야만 한다. 제도의 세계에서 경제행위자들의 관계는 교환의 신뢰성과 오랜 시간에 걸친 인간의 삶을 보증해 주는 제3의 기관 아래 놓인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세 시대의 시장, 예를 들어 벨기에 브뤼셀의 시청 앞 광장에 발을 디디기만 하면 된다. 중세 시장의 건축적 아름다움은 시장의 제도적 의미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광장 둘레에는 시장의 원활한 작동을 좌우했던 제도들이 자리 잡고 있다. 거래 규칙(무게와 척도에 관한 규칙)을 보증하는 시정부가 자리 잡았던 시청 건물, 교환할 부를 만들어 내는 노동의 지위와 질을 보증하는 동업조합들이 자리 잡았던 다양한 직종(푸주한·제빵사·양조사 등)의 회관들이 그것이다. 다양한 건물들은 또한 시장 공간의 한계를 설정하는 것이었다. 법원 건물이나 왕궁을 방문하기 위해 시장 공간을 벗어나면 시장 규칙과는 다른 규칙이 적용됐다. 만약 판사나 정치인이 시장 법칙에 구속된다면 그들의 결정은 사고팔 수 있는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도시는 부패하고 정직한 상인들은 더 이상 자유롭게 일할 수 없게 된다.

현대 시장은 그러한 지리적·건축적 일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여전히 동일한 제도적 작동 조건들에 구속된다. 진정한 계약은 계약 당사자들이 약속 이행을 보증하는 자(신·왕·국가 등)의 관할 아래 놓이게 될 때에만 가능하다. 그러한 보증인이 없는 경우에 계약이란 강자의 법을 의미할 뿐이다. 마찬가지로 소유권도 인간과 사물 간의 양면적 관계가 아니다. 소유권 행사는 각자 소유권이 모두로부터 존중될 것을 보증하는 제삼자의 존재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국가 파산이나 부패로 인해 이러한 조건이 결여되는 경우 하나의 사물을 한 명의 사람에게 결부시키는 관계 의제는 유지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인간 사이의 지배-종속 관계가 다시 제일의 원칙이 되고, 약자는 죽지 않거나 그나마 가진 것을 뺏기지 않기 위해서 강자에게 충성을 맹세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시장은 지난 삼십 년 동안 극단적 자유주의와 공산주의시장경제가 금융시장 탈규제와 사회환경입법 경쟁화를 통해 체계적으로 무너뜨리려고 노력한 제도적 기초 위에 서 있는 것이다. 탈규제가 극단으로 진행된 금융시장이 가장 먼저 붕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간단한 법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다. 금융시장 붕괴는 경제적 관점에서도 예측 가능한 것이었으며, 오래전부터 일부 경제학자들은 실제로 금융시장 붕괴를 예고했다.

그런 경제학자들은 동료평가 시스템 학술지에는 논문을 발표하지 않았고, 아무도 그 사람들에게 알프레드 노벨을 기념하며 경제학에 부여하는 상을 수여하려고 하지 않았다. 아무도 이러한 경고를 경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사회 분야와 환경 분야에서도 마찬가지가 되지 않을까 우려할 수밖에 없다. 스스로를 도그마로 인식하며 다양한 해석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법률적 도그마와 달리 과학주의적 도그마는 도그마로 인식되지 아니하며 모든 종류의 외부적 비판에 완벽하게 차단돼 있다. 이것은 과학주의적 도그마의 강점이기도 하지만 오늘날 극단적 자유주의 이론과 같이 실재의 원칙에 의해 반박당할 때에는 약점이 되기도 한다.

극단적 자유주의 이론을 체화하는 정치와 경제 엘리트들은 그러므로 왜 자신들이 발 딛고 서 있는 세계가 붕괴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과거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가 그러했다. 과학적 사회주의 해체 또는 붕괴를 사고할수 없었던 그들은 무조건적인 사회주의 옹호에서 이탈해 극단적 자유주의라는 새로운 교리에 조건 없이 가담하는 데 단 몇 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오늘날 그 교리에 가입하고 자신이 차지하는 지위를 그 교리에 빚지고 있는 자들(종종 같은 사람들이다)의 경우도 그러하다.(2부 사회정의의 현재성 중에서)

(…)

이처럼 의료보험과 의료 종사자들의 교차점에 협동조합을 두는 것은 현행 시스템의 일부 어리석음, 특히 진료행위를 남발시키고, 여전히 충분한 시간을 갖고 환자들에게 말을 거는 의사들을 불리하게 만들면서, 반대로 기술적 처방전 남발로 환자와의 대화를 대체하는 의사들을 보상하는, 행위별 수가제에 종지부를 찍게 만든다.

협동조합은 적정진료와 일반의 또는 환자와의 대화(이런대화의 질이 떨어지면 분쟁이 증가하게 된다)를 촉진하고, 의료사막에 다시 사람이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방향으로 진료비 지불 제도를 개혁하는 일에 좀 더 적절하다. 협동조합은 이 모든 일을 하기 위해 의료계의 근본적인 사회학적 변화로부터 교훈을 도출하는 일에서도 좀 더 나은 점이 있다. 근접연대

에 근거한 제도들에 실질적인 역할을 부여하는 것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의료보험을 지탱해야 하는 국민연대를 약화시키기보다는 강화시키는 데 기여할 것이다. 그것은 의료 제도가 어리석은 배관공의 모습으로 전락해 가는 대신 좀 더 저렴하면서도 인간이 겪는 고통의 모든 동기들에 주의를 기울이는 의료 제도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둘째, 일국적 사회보장 시스템은 사회적 위험의 지구화를 고려해야 하며, 국제적 연대 메커니즘을 형성하는 데 참여해야 한다. 전 세계적 차원에서 전염병과 병원균의 자유롭고 신속한 이동, 전 지구적 차원의 생태 위험 증가, 부자 나라들의 인구 고령화, 가난한 나라들에서 만연하는 불안과 빈곤을 탈출한 사람들의 대규모 이민 등은 일국적 연대고리 속에 머물러서는 대처할 수 없는 요소들이다.

일국적 연대고리 속에서 이러한 유형의 위험에 맞서는것은 진퇴양난에 빠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불법 이민자들의 사회적 지위에 관한 논쟁은 이에 관한 완벽한 사례를 제공해 준다. 우리의 엄숙한 선언들에 의해 천명된 사회적 기본권들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사회보장에 관한 권리를 거부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존엄성을 구성하기 때

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권리를 향유하지 못하고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사람에게 일국적 연대 시스템을 확장할 수도 없다. 진퇴양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지금까지 채택된 해법은 이중적이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시민권을 승인하는 기준의 관점을 바꿔 자국 영토 내에 일정 기간 체류했음을 입증하는 불법 이민자들에게는 전부 또는 부분적으로 사회적 시민권을 승인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유럽을 불법 이민자의 쇄도로부터 보호하는 마지노선을 긋는 것이다.

이러한 해법은 만족스럽지도 않고 오래 지속될 수도 없다. 사회적 기본권에 접근할 수 있는 권리를 유럽인들이 스스로를 가두기 위해 설치한 바리케이드를 돌파하기 위해 매일 수천 명의 사람들이 벌이는 죽음의 경주에 대한 대가로 만들기 때문이다. 도중에 죽는 자, 쫓겨나는 자 또는 어찌 됐든 고국에서 살아남으려고 시도하는 자들은 일국적 연대고리 바깥에서 자신의 운명에 내맡겨진다.

경제 영역과 분리된 채 자기완결적 구조를 갖는 일국적 연대 시스템을 전 세계 차원으로 단순히 이식하는 문제로 사회보장제도를 사고하는 한 우리는 이러한 아포리아에서 벗어날 수 없다. 대규모 불법 이민 같은 문제는 특히 국제 무역 체제의 부정의함이라는 원인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다.

이민을 떠나는 나라들이 아니라 이민을 오는 나라들과 관련해서만 그 효과를 고찰하는 경우에도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아프리카 젊은이들이 생명을 건 위험에도 불구하고 유럽에 이민을 갈 수밖에 없도록 내모는 것은, 그들의 나라가 20년 동안의 구조조정과 무역 탈규제 정책 이후 빠져든 빈곤 및 경제적 불안정으로 인해 고국에 제대로 된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이다. 불법 체류자들과 연대하는 것은 전적으로 필요하다. 모든 곳에서 사회적 기본권을 존중하도록 만드는 것이 목적이라면 핵심은 따로 있다. 그것은 오늘날 국제 관계에서 중시되는 소극적 연대를 넘어 좋은 노동과 사회정의를 국제 무역 체제의 공동목적으로 삼는 적극적 연대로 이행하는 것이다.

국제 무역에 관한 규칙들의 중심에 연대 원칙을 세워야 한다(이것은 특히 “원자재·식료품 국제 가격의 더욱 큰 안정성 보장”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러한 규칙을 인간의 경제적 안정에 실제로 미친 영향에 비춰 평가할 수 있는 수단을 확보해야 한다(선언, II-c). 이 원칙은 유럽 내부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시돼야 한다.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벌이는 사회법·조세법 최저가 입찰 경쟁에 종지부를 찍을 때다.

경쟁 과열은 자국 보호주의 회귀를 초래할 뿐이다. 19세기 말 비스마르크는 태동하는 사회보험을 독일 통일을 공고히 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지혜로움을 보여줬다. 왜 유럽은 21세기 초입에 노동자들의 능력을 고양하기 위한 새로운 연대 수단들을 가질 수 없단 말인가? 왜 유럽은 필라델피아 선언이 정한 목적과 수단의 위계를 재정립하는 본보기가 될 수 없단 말인가?(9장 연대의 고리들 중에서)

(…)

저자는 말한다. 산업혁명 이래 제국주의에 잘 저항했던 나라들은 스스로를 파괴하거나 예속시키지 않으면서도 서양 근대성의 일부를 제 것으로 삼을 줄 알았다. 한국은 그중 하나다.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할 때 자기 자신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 다양한 문화 사이에 가교를 놓고 가능한 한 많은 사람에게 이방인의 관점을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애쓰는 뱃사공 역할이 소중한 까닭도 여기에 있다. 이 책의 목적은 지금 우리가 겪는 사회제도 위기에 대한 진단과 그것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은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한국어판 초판 서문 중에서)



[저자 및 역자 소개]

* 지은이 : 알랭 쉬피오(Alain Supiot)

1979년 프랑스 보르도대학에서 「판사와 노동법」이라는 논문으로 국가박사 학위를 받았다. 푸아티에대학과 낭트대학을 거쳐 2012년부터 지식의 신전이라고 일컬어지는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로 재직하면서 “사회국가와 세계화 : 연대에 관한 법학적 분석”이라는 강좌를 맡고 있다. 실정법에 대한 비판적 해석에 머물지 않고,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초래하는 법치와 노동의 위기를 학제 간 연구를 통해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2008년 서양과 비서양의 비판적 연구자들이 교류하면서 연구하는 낭트고등과학연구원을 설립해 2013년까지 원장을 역임했다. 주요 저서로는 <노동법비판>(1994), <고용을 넘어>(1999), <법률적 인간의 출현>(2005), <필라델피아 정신>(2010), <숫자에 의한 협치>(2015) 등이 있다.

* 옮긴이 : 박제성

2005년 프랑스 낭트대학에서 알랭 쉬피오의 지도 아래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6년부터 한국노동연구원에서 재직하고 있다. <기업집단과 노동법> <사내하도급과 노동법> <프랜차이즈 노동관계 연구> 등의 보고서를 펴냈으며, <하청노동론 : 근로계약의 도급계약화 현상에 대한 법학적 분석>을 썼다. <노동법비판>과 <법률적 인간의 출현>을 비롯해 알랭 쉬피오의 주요 저작과 논문을 한국어로 번역했다.



[목 차]

한국어판 초판 서문 3
서문 10

1부 거대한 반전 31

1장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 32

극단적 자유주의 반혁명 32
“사회적 유럽”의 변형들 40
공산주의시장경제 43
2장 복지국가의 사유화 51
3장 시장전체주의 66

규범진화론 72
최저가 입찰 경쟁 79
4장 계량화의 환상들 85
숫자에 의한 협치 88
자기준거의 함정 92

2부 사회정의의 현재성 103

5장 한계의 기법 110

법률의 인격화 111
봉건의 르네상스 117
종속의 한계들 125
6장 척도의 의미 131
평가 기준 : 사회정의라는 목적 135
척도의 실천 및 표상 형태의 다양함 140
7장 행위능력 149
8장 책임의 부과 167
9장 연대의 고리들 182

[부록] 국제노동기구의 목적에 관한 필라델피아 선언
(국문・영문・불문) 201

출판팀  book@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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