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기훈 기자

열흘 넘어서니 짧은 머리카락이 제법 자리를 잡았다. 나순자(54·사진) 보건의료노조 위원장 얘기다. 나 위원장은 지난 11일 청와대 앞 농성을 시작했다. 같은날 노조가 참여하는 제주영리병원철회 및 의료민영화저지 범국민운동본부가 연 결의대회에서 삭발했다. “영리병원 문제는 전 국민적인 사안인 만큼 정부와 청와대가 나서 막아야 합니다.” 나 위원장이 밝힌 청와대 앞 농성의 이유다. 20일까지 하기로 했던 농성은 무기한 연장된 상태다.

제주도는 지난해 12월5일 외국인 진료만 허용한다는 조건을 달아 녹지국제병원 개원을 허가했다. 의료법에 따라 녹지국제병원은 허가 90일 이내인 다음달 4일 개원해야 한다. 시한 내 개원은 불투명한 상황이다. 최근 중국 녹지그룹이 전액 투자한 녹지제주헬스케어타운유한회사는 병원 개원을 앞두고 내국인 진료제한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내국인 우회투자 의혹을 비롯한 졸속 허가 논란도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노동·시민단체는 영리병원 철회와 공공병원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매일노동뉴스>가 나 위원장을 지난 22일 오전 서울 영등포구 노조사무실에서 만났다.

“녹지국제병원 개원하면 영리병원 빗장 풀려”

- 애초 계획과 달리 무기한 농성으로 전환했다. 이유가 있나.
“녹지국제병원 개원 시한을 앞두고 농성을 중단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와 청와대는 영리병원 문제는 제주도가 저지른 일이라며 나서지 않으려 하고 있다. 청와대가 빠른 시일 내에 문제 해결에 나설 것을 요구하는 노조의 의지를 보여 주는 차원에서 농성을 이어 가기로 했다.”

- 중국 녹지그룹이 내국인 진료제한을 풀어 달라는 행정소송을 냈다. 소송 결과와 다음달 4일 병원 개원 여부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노조는 행정소송에서 제주도가 필패한다고 전망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설치 및 국제자유도시 조성을 위한 특별법(제주특별법) 어디에도 내국인 진료를 제한하는 조항이 없기 때문이다. 제주특별법에 따르면 법에 적시하지 않은 사항에는 의료법이나 약사법을 적용해야 한다고 규정돼 있는데, 의료법 15조에는 의료인이나 의료기관은 정당한 사유 없이 진료를 거부하지 못한다고 돼 있다. 개원과 관련해 제주도는 다음달 4일까지 개원하지 않으면 2주 내에 청문회를 거쳐 취소 절차를 밟겠다는 입장이다. 그런데 녹지그룹측에서는 다음달 4일 이전에 개원시기를 연장해 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낼 것 같다.”

- 제주도가 패소하면 이후 상황은 어떻게 되는 건가.
“제주도가 패소해서 녹지국제병원에서 내국인 진료가 가능해지게 되면 당연히 영리병원을 운영할 것이라고 본다. 문제는 녹지국제병원 하나가 개원하면 우리나라 경제자유구역에 영리병원이 모두 허용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실제 대한병원협회에서 회원 병원들을 대상으로 영리병원이 허용됐을 때 할 거냐 말 거냐를 가지고 설문조사한 적이 있는데, 80퍼센트 정도가 영리병원으로 전환하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영리병원을 허용하게 되면 미국처럼 의료비 폭등과 건강보험 붕괴, 민간보험 활성화 같은 현상이 발생할 수 있다. 미국에 첫 영리병원이 개설되고 난 뒤 의료비가 폭등할 때까지 20년밖에 안 걸렸다. 우리나라는 10년도 안 걸릴 것이다.”

- 제주도가 승소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제주도가 진다고 전망하지만, 만약 제주도가 승소하더라도 녹지병원이 손해배상 소송을 할 것이다. 병원을 개원했으면 벌 수 있었을 돈을 감안해 녹지그룹이 손해배상으로 3천500억원 정도를 청구할 것으로 예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국민 혈세가 낭비될 수 있다는 의미다. 제주도가 소송에서 이기거나 지거나 상관없이 국민에게는 손해가 되는 상황이다.”

2015년 12월 박근혜 정부는 헬스케어타운 사업계획서를 승인했다. 녹지그룹은 애초 사업계획에 따라 부지를 매입하고 헬스케어타운 조성사업을 추진했다. 녹지국제병원은 헬스케어타운 사업의 첫 사업이다. 정부가 사업계획서를 승인하면서 내국인 진료 불가 조건을 내걸지 않았으니 제주도의 허가 조건이 과도하다며 행정소송을 냈는데, 행정소송에서 패소하면 개원을 하지 않고 손배를 청구한다는 게 일부 전문가들의 예상이다.

- 바람직한 시나리오는 무엇인가.
“지금 시점에서 그나마 좋은 방법은 제주도가 지금이라도 녹지제병원을 공공병원으로 인수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리병원 개원을 막을 수 있고 우리나라 공공의료를 확대·강화할 수도 있다. 특히 제주도 서귀포시는 의료시설이 낙후됐다. 서귀포시 주민들이 질 높은 진료를 받기 위해서도 이 병원을 공공병원으로 인수해야 한다.”

▲ 정기훈 기자


"녹지그룹 개원 의사 강하지 않아
정부 협상력 발휘해 공공병원 만들어야"


- 제주도가 녹지국제병원을 인수할 수 있나.
“녹지그룹측은 영리병원 개원 허가를 받기 전에 이미 제주도에 공문을 보내 포기 의사를 밝힌 적이 있다. 지금이라도 제주시와 정부·청와대가 협의하면 충분히 인수 가능하다고 본다. 다만 녹지그룹측이 투자한 돈을 얼마나 회수할 수 있느냐가 협의에서 쟁점이 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부분은 정부가 협상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본다. 소송 결과는 6~9월 정도에 날 것으로 보이는데, 결과가 나고 병원이 개원하면 인수가 더 어려워질 수 있으니 소송 결과가 나기 전에 빨리 협의 틀을 만들어 논의하자고 정부에 요구하고 있다.”

- 병원 인수에 드는 비용은 얼마 정도로 추산하나.
“건물을 짓는 데에만 778억원이 들어갔고, 완공된 상태에서 1년 반 동안 유지하기 위한 인건비나 부대비용으로 100억원 넘게 들었다고 알려졌다. 1천억원 가까이 든 셈이다. 노조는 새로 병원을 지으려 해도 그 정도는 들어간다고 본다. 녹지그룹측이 3천억원 넘는 돈을 요구할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지만, 건물을 지은 지 1년 정도 됐으니 감가상각비를 고려하면 감정가 620억원 정도로 볼 수 있지 않느냐는 의견도 있다.”

- 돈이 문제다. 재정은 누가 부담하나.
“정부와 제주도가 함께 부담해야 한다고 본다. 박근혜 정부 때긴 하지만 사업계획서를 승인해 준 것은 보건복지부다. 복지부나 정부가 이번 영리병원 논란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우리나라 1년 예산이 460조원을 넘고 제주도 예산이 5조원을 넘는다. 500억원이나 1천억원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재정이다.”

-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이번 제주 영리병원을 만약 확실히 막는다면 이후로 경제자유구역을 포함한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영리병원을 감히 하겠다고 엄두를 내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본다. 그래서 이 투쟁은 제주 영리병원 하나만 막는 투쟁만이 아니라 이후로도 우리나라에 영리병원이 단 하나도 도입되지 않게 하는 투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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