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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념에서 용기로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 김혜진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세계인권선언문 1조는 "모든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유롭고 존엄과 권리에 있어 평등하다"고 말한다. 세계인권선언문의 권리항목 모두가 중요하지만 나는 '사람이 권리의 주체'임을 선언하는 이 조항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유엔에 가입해 있으나 이 조항을 제대로 승인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너는 노동자이니 상관의 갑질도 견뎌야 한다"고 말하고, "비정규직인 줄 알고 들어갔으니 모욕적 차별도 참아야 한다"고 요구하며, "영세 사업장에서 일하니 근로기준법을 적용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사회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세계인권선언문에서는 "이 선언을 항상 염두에 두고 이 권리와 자유에 대한 존중을 깊게 하도록 교육하라"고 의무를 부여하지만, 한국은 오히려 "권리와 자유는 승자의 전유물"이라고 가르치고 있지 않은가.

한국 사회에서 고용형태는 일종의 신분이 됐다. 단지 비정규직이라는 이유만으로 가해지는 불합리한 차별과 권리박탈, 모욕감을 견뎌야 한다. 그런데 이런 차별이 지속되면 노동자들은 점차 무기력해진다. 개인이 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절망감이 깊어지면 노동자들은 자기 합리화를 하게 된다.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라거나 "이런 일자리라도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거나 "잠깐 지나가는 일일 뿐"이라고 자기위안을 한다. 때로는 자신이 능력이 없거나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자신을 탓한다. '존엄과 권리'가 있는 사람인데도, 그 권리는 누구도 함부로 훼손할 수 없는 것인데도, 많은 노동자들은 쉽게 체념하고 자신이 권리의 주체라는 사실을 잊는다.

최저임금이 오를 때 영세 사업자들을 걱정하는 목소리는 높지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어떨까는 잘 고려되지 않는다. 그 노동자들이 작은 사업장에서 일한다는 이유만으로 함부로 해고되거나 노동시간을 적용받지 못해도 영세 사업장이니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노동자들도 그 "어쩔 수 없다"는 논리를 수용한다. 많은 노동자들이 체념하고 침묵한 탓에 일터는 점점 나빠졌다. 노동자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도 사라지고 경쟁과 차별과 인격침해가 일상이 됐다. 열린카톡방 ‘직장갑질119’에는 자신의 고통을 호소하는 노동자들로 넘쳐난다. 좋은 직장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대학병원 노동자들은 성희롱에 시달렸고, 항공사 노동자들은 갑질에 고통받고 있었다. 노동자들은 소모품이었다. 모두가 모르는 척하고 있었을 뿐, 한국 사회 일터는 더 이상 자유롭지도, 권리에 있어 평등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변화는 시작됐다. 자신을 권리의 주체로 선언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한림대성심병원 노동자들이 체념을 이기고 노동조합을 만들었다. 대한항공·아시아나항공 노동자들이 오랜 기간 두려움을 뚫고 가면을 벗고 나섰다. 게임산업 노동자들이 노조를 만들어 권리를 외치고 있다. 공공운수노조는 급격하게 노조 가입률이 늘어나면서 조합원이 20만명을 넘어섰다. 민주노총은 여세를 몰아 조합원을 200만명으로 늘리자고 선언했다. 대표적인 무노조 사업장으로, 노조를 만들고 지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꿈꾸기 어려웠던 삼성과 포스코에서도 노동조합이 만들어지고 있다. 노동자들의 '체념'이 '용기'로 바뀌고 있다.

그런데 이런 흐름 속에서도 용기를 내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비정규 노동자들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이다. 8월30일 기아자동차 관리자로 구성된 구사대가 파업 중인 사내하청 노동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해 여러 명이 다쳤다. 비정규직들에게 이런 물리적 폭력이 버젓이 자행되는 시대에 용기를 내기는 참으로 어렵다. 전국기간제교사노조의 경우 실직자와 구직자가 포함돼 있다는 이유로 설립신고를 반려당했다. 취업과 해고를 반복하는 것이 노조가 필요한 이유인데, 그 이유가 노조를 인정하지 않는 근거가 되고 있다. 기업별 교섭이 '강요'되고 있기에 작은 사업장 노동자들은 노조를 만들어도 노동조건이 개선될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여전히 체념의 정서가 지배한다.

노동자들이 권리의 주체가 되는 것은 이제 대세다. 가장 힘든 노동을 하고 있는 비정규직과 중소·영세 사업장 노동자들, 노동자로도 인정받지 못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이 대세에 합류할 수 있도록 할 것인가가 흐름의 힘과 양을 결정한다.

노동조합이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을 염두에 두고 200만명 조직화를 선언한 지금, 조금 더 쉽게 노조를 만들 수 있는 노동자들보다 노조를 만들기 어려운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에게 더 힘을 쏟고, 이들에게 드리워진 체념의 정서를 걷어 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 기대한다. 비정규직과 영세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조할 권리’를 위한 싸움에 민주노조운동 모두가 함께할 것이라고 믿는다.

전국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 (work21@jinbo.net)

김혜진  laborto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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