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유리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1974년 뉴욕 보니노 화랑. 이곳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준비하던 백남준(1932~2006)은 작품 설치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작품들을 갖다 놓고 보니 화랑 공간이 생각보다 넓었다. 휑하게 비어 있던 한쪽 벽을 그냥 둘 수 없었던 백남준의 고민은 날로 깊어 갔다. 애초 그는 전시장 천장에 TV 모니터를 가득 매달고 불을 끈 뒤, 하늘에 물고기가 가득 날아다니는 것과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는 영상작품을 설치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그 많은 TV를 구하기란 요원했다. ‘하늘을 나는 물고기’ 대체물을 찾던 백남준은 그때, 뉴욕 맨해튼 골동품 가게에서 사서 따로 보관하고 있었던 부처상이 문득 떠올랐다. “도쿄에 살던 형에게 받은 1만달러를 허접한 불상을 사는 데 써 버렸다”며 아내의 구박을 받았던 그 천덕꾸러기 부처상. 백남준은 그 넓은 공간을 비워 놓는 것보다는 부처님이라도 모셔 놓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TV부처>가 탄생했다. 재료는 간단했다. 부처와 TV모니터, 폐쇄회로 카메라, 부처를 올려놓은 대가 전부였다.

설치해 놓고 보니, 작품은 오묘해졌다. 부처가 TV에서 보고 있는 건 비디오카메라로 잡은 그 자신인데, TV 속에 재현된 자신의 형상을 다시 부처가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전시가 개막하자 제일 주목을 받은 건 바로 얼렁뚱땅 아슬아슬하게 시간 맞춰 설치한 <TV부처>였다. 비평가들은 한목소리로 "서양의 과학기술과 동양의 명상세계를 잘 접목시켰다"고 찬사를 보냈다. “실재인 부처가 TV 속 가상의 부처를 보고 그 가상의 부처를 보는 모습이 다시 TV에 잡히는 것을 통해 실재와 가상의 영역에 대한 성찰을 보여 주는 작품”이라는 평도 나왔다. 그전까지 백남준은 피아노와 바이올린을 때려 부수는 등 과격한 행동이나 일삼는 ‘동양에서 온 테러리스트’였다.

백남준, <TV부처>, 1974년, 부처상, 모니터, 카메라,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

<TV부처>를 통해 백남준은 예상치 못한 퍼포먼스를 주로 하던 이방인에서 철학적 통찰을 보여 주는 예술가로 거듭났다. 우연히 ‘꿩 대신 닭’으로 설치한 작품이 운 좋게도 대박을 터뜨린 것이다. <TV부처>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스테델레이크 미술관이 구입하면서 백남준의 작품 중 최초로 팔린 작품으로 기록됐다. 떠오르는 ‘비디오 아티스트’로서 백남준이 예술계에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비디오 아트 시작한 이유 “돈이 없어서”

사실 <TV부처>는 결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작품이 아니다. 백남준은 <TV부처>를 선보이기 3년 전인 1963년에 이미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에서 비디오 아트를 선보인 적이 있었다. 우연히 만들어진 <TV부처>는 3년 동안 비디오 아트에 대한 그의 부단한 관심과 노력으로 일궈 낸 성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백남준은 어쩌다가 비디오 예술에 손을 대게 됐을까. 생전에 백남준은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을 했었다. “돈이 없어서” 비디오 예술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돈이 없으면 어떤 예술이든 하는 것이 어려우니, 어차피 다른 예술도 하기 어려울 바에야 아예 남들이 너무 비싸서 못하는 비디오를 하자고 마음먹었다는 얘기다. 어차피 빚을 내어 예술을 한다고 해도 여전히 아리송한 이유다. 돈이 없으면 예술을 할 생각도 못하는 게 보통 사람들인데, 반대로 돈이 없었기에 제일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비디오 예술을 했다고 당당하게 밝힌 ‘가난한 예술가’ 백남준. 하지만 그는 모두가 가난했던 1960년대에, 심지어 첫 개인전에서도 세 대의 피아노와 기술적으로 화면을 조작한 13대의 흑백TV를 설치했던 사람이었다.

<TV부처> 발표 전 그의 이름이 독일에서 조금씩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도 상상을 초월하는 과격한 해프닝과 퍼포먼스 때문이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남들은 한 대도 없는 고가의 피아노를 네 대씩이나 가지고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이렇게 백남준은 자신의 설명과는 다르게 돈이 없기는커녕 ‘부유한 집안’ 덕을 톡톡히 본 주인공이었다. 아예 대놓고 말할 수 있다. 백남준은 억세게 운 좋은 사람이었다. 단지 그가 우연히 만들어 낸 작품으로 이름을 날릴 수 있게 됐다는 ‘행운’만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시작부터가 남달랐다. 신은 그의 입에 금수저를 꽂아 준 채 세상으로 내보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1932년 7월20일 서울 종로구 서린동에서 한국 최고 재벌 집안의 막내로 태어났다. 백남준의 할아버지 백윤수는 국상 때 조정 벼슬아치들이 입을 상복과 제복을 도맡아 만들 정도로 큰 포목상을 운영했고, 아버지 백낙승은 해방 후 최대 섬유업체인 태창방직 사장이자 홍콩을 오가는 무역상이었다. 자동차 자체를 보기 힘들었던 1940년대 서울에서 백남준은 국내에 딱 두 대밖에 없었다는 캐딜락 승용차를 타며 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하니 더 말할 나위가 없겠다. 6·25 전쟁의 포화도 ‘부잣집 막내아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다. 일본과의 국교조차 없던 시절인 1952년 백남준은 도쿄대학에 입학했고, 대다수 한국인이 전쟁 후유증으로 고통스러워할 때인 1956년엔 아예 독일로 건너가 유학생활을 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곱게 생활하던 백남준은 1959년 피아노를 때려 부수는 과격하고도 의외의 행동을 하며 예술계에 충격적으로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퍼포먼스 <존 케이지에게의 경의>로 ‘플럭서스(Fluxus) 예술가’로 데뷔하게 된 것이다.

재벌 집 막내아들, 전위예술을 만나다

플럭서스는 라틴어로 ‘흐름’ ‘끊임없는 변화’ ‘움직임’이라는 뜻으로, 의외성을 기초로 한 반자본주의적 성향의 예술적 행동주의를 일컫는 말이다. 어쩌면 당시 유럽은 플럭서스가 자랄 수밖에 없는 예술적 토양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나치즘과 파시즘이라는 극도의 권위주의와 전쟁의 비인간화가 휩쓸고 간 전후(戰後) 독일 예술계는 안간힘을 다해 새로운 문화예술 환경을 만들어야 했다. 일단 서구사회의 문화예술적 전통을 답습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환멸의 대상이었다. 그리하여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은 서구의 이성과 논리의 전통, 그것이 예술이라고 지칭한 모든 것들에 대해 격렬히 반기를 들고 봉기했다. 이는 유럽 엘리트 예술가들이 아닌 변방 출신 예술가들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결과를 낳았고, 때마침 타이밍 좋게도 백남준은 그 시절 독일에 있었다. 이 시대적 수혜를 받은 ‘동양인 백남준’은 곧 두각을 나타냈다. 피아노를 사정없이 부순 백남준의 퍼포먼스는 ‘플럭서스’ 이념을 눈앞에 재현한 것과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백남준은 고상한 ‘전문가’ 관객들 앞에서 피아노를 피아노로서 대접해 주지 않았다. 모든 것이 악기가 될 수 있단 그의 생각은 아름다운 선율을 빚어내는 악기인 피아노의 오랜 권위를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백남준이 TV를 가지고 예술을 시작했던 것도 ‘터부와 신화를 깨는’ 플럭서스 이념에 걸맞은 시도였다. 비디오 예술의 첫 전시회로 기록된 1963년 3월 독일 부퍼탈 ‘음악의 전시-전자텔레비전’ 전시에서 백남준은 기술적으로 화면을 조작한 13대의 흑백텔레비전을 가져다 놓았다. 이 전시 속에서 TV는 온갖 수난을 겪었다. 영사막은 거꾸로 뒤집히고, 개조된 TV 수상기 때문에 송출되는 영상은 어지럽게 교란됐다. 백남준이 비싼 TV를 이런 식으로 ‘고장’ 내어 놓은 이유는 간단했다. TV가 1960년대 대중문화의 성상이며 우상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TV가 재산가치가 있는 귀중한 가구로서의 역할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무자비하게 공격하고 해체시켰다.

하지만 우상을 해체시키기 위해서는 먼저 우상을 손안에 쥐어야 하는 법. 그는 비싼 TV를 수중에 넣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낌없이 돈을 털어 넣어야 했다. ‘금수저 도련님’ 출신이었던 그는 주저하지 않았다. 백남준의 아내이자 똑같이 비디오 아티스트였던 구보타 시게코(1937~2015)에 따르면 시게코는 많아야 서너 대, 그것도 고장 난 TV만을 사용해 작품제작을 했지만 백남준은 돈이 얼마나 드는지 털끝만큼도 상관하지 않고 수십 대, 수백 대의 TV를 사다가 작품을 만든 ‘통 큰 남자’였다.

이처럼 백남준은 부잣집 도련님이었기에 값비싼 피아노를 ‘용감하게’ 부수고, TV를 한꺼번에 사서 못쓰게 만들며 ‘유명 예술가’로 거듭날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는 백남준과 1968년부터 3년 동안 뉴욕에서 친밀하게 지냈던 황병기 가야금 명인의 증언에서도 엿볼 수 있다. 2006년 7월 백남준 추모좌담회에서 솔직하게 꺼내 놓은 황병기 명인의 다음과 같은 말은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듯하다.

“백남준이 천재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오늘의 이런 대단한 아티스트가 되기 어려웠고 그분이 태어난 시기가 절묘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우리나라의 근대사 내지 현대사에서 하필이면 그때 태어났느냐. 저의 4년 선배인데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8·15 해방과 6·25 전쟁을 겪고, 이런 와중에 그 당시로서는 누구나 아시다시피 우리나라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재벌 집 아들로 태어났지요. 어렸을 때부터 작곡을 했고, 실제로 작곡발표회를 가졌는지는 모르지만 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선생이 재벌의 아들로 태어났기 때문에 어렸을 때 피아노를 칠 수 있었고, 보통 사람들은 상상도 못하는 스트라빈스키라든가 하는 값비싼 악보들을 겨드랑이에 끼고 다니고, 음반도 듣고, 홍콩에도 가곤 했으니 그 시대에 그런 재벌이 아니면 안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백남준의 창작의 힘은 그런 부유한 환경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이뤄질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하필 그때 태어나 독일로 가서 (…) 결과적으로 태어난 시기가 참 중요했던 게 아닌가 해서 이야기합니다.”

<화가의 마지막 그림> 저자 (sempre80@naver.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