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황기돈 한국고용정보원 고용정보연구본부장

장면 1. 베트남 하노이의 점심시간. 덥고 후텁지근해 견디기 힘들다. 냉방이 잘된 카페에 들어갔다. 의자에 편히 누워 자는 사람이 여럿이다. 넥타이에 정장 차림이다. 의문은 현지 통역이 풀어 준다. 더운 날씨 탓에 휴식이 다시 일하기의 필수조건이란다. 이를 나무라는 건 금기란다. "푹 쉬라"고 상급자가 진심으로 말하더라도 어쩔 줄 몰라 할 한국과 많이 다르다. 베트남 주재 한국 기업의 갈등적 노사관계의 주요 원인이라는 현지 전문가의 전언이다.

장면 2. 베트남 노동사회부 회의실 호찌민 흉상을 보고 “베트남의 국부”라고 아는 척했다. 베트남 공무원이 정색을 하며 국부가 아니라 “호 아저씨”란다. 지도자와 국민의 관계가 아버지가 상징하는 수직이 아니라 사선(斜線) 관계란다. 여러 차례 외세 침략을 물리치고 통일된 독립국을 이룬 혁명·민족지도자를 친근한 이웃 아저씨로 여긴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충격이다.

최근 경제성장에 나름 성공한 베트남은 경제의 질적 도약을 도모하고 있다. 베트남이 한국에 지원을 요구하는 분야는 주로 노동법 개정, 노사관계, 기업단위 노조관리자 역량 강화다. 그런데 이 분야에서 베트남은 이미 다양한 국제기구와 유럽 여러 국가와 협력하고 있다. 현지화는 해외투자의 핵심 성공요인으로 국가 차원의 원조나 공공 국제협력에도 적용할 수 있는 원칙이다. 공공지원·국제협력 현지화의 출발은 현지에서 활동하는 기업의 이미지 개선이다. 기업 이미지는 국가 이미지의 핵심 구성요소이기 때문이다.

평등이라는 사회주의 이념을 베트남에 적합하게 변형한 것이 인간·조직관계의 사선관계다. 이런 이념과 사회적 관계로 구성된 베트남에 진출한 기업에서 권위주의와 폭력은 금기다. 아쉽게도 한국 기업이 이 금기를 상대적으로 많이 어기고 있다. 베트남에서 지난 8년 동안 발생한 들고양이 파업(wildcat strikes), 즉 노조 통제 없이 현장 노동자가 자발적으로 한 파업의 30% 이상이 한국 기업에서 발생한 이유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한국이나 한국 기업과의 관계를 재검토할 수 있다는 베트남노총 고위관계자의 언급은 강력하고 솔직한 경고다. 그래서 베트남 진출기업이 한국과 베트남의 차이를 지금보다 더 잘 알고 현지 여건에 적응할 수 있도록 교육이나 정보제공 서비스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근로자를 성공요인으로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리자의 합리적 리더십을 키우는 것도 중요한 과제에 속한다.

사회문화적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기반으로 원조와 협력이 이뤄져야 한다. 한국인의 질서의식과 부지런함, 유교적 전통이 한국 자본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것은 분명하다. 그렇지만 한국의 특이한 성공요인을 기준으로 베트남을 무질서하고 게으르며 사회주의적 평등주의에 빠져 있는 나라라고 평가하지 말아야 한다. 자연환경이 규정한 관습, 개인 간 사선관계는 베트남이 틀린 게 아니라 한국과 다르다는 것을 보여 주는 지표일 뿐이다. 그런데 근거 없는 우월주의는 수직적 관계를 요구하거나 상대방을 무시하는 근거가 된다. 차이를 인정하는 것은 기업경영과 국가 차원의 원조나 협력관계 모두에 해당하는 성공요인이다.

일터혁신은 한국의 특별한 공공서비스로, 상대적으로 경쟁이 덜한 영역이다. 베트남과 국제협력을 한다면 유력한 협력 영역이지만 철저히 현지화할 필요가 있다. 임금체계 변화를 포함한 일터혁신은 자본주의적 합리화를 추구하는 도구다. 이를 사회체제·노동자 의식이 한국과 다른 베트남에 이전할 경우 많은 갈등을 야기할 수 있다. 문제를 예방하는 핵심 수단은 바로 내용의 현지화다. 우선 관련 전문가를 현지에 파견해 한국과의 차이를 파악하고 국내에서 활용되는 일터혁신 매뉴얼을 수정·보완해야 한다. 현지에서 활동 중인 국제기구와 협조관계를 구축·활용하는 것도 현지 수용성을 높이는 방안이다. 그리고 베트남의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 관련 교육훈련을 제공하고 현지에서 장기적으로 한국 지원업무를 수행하는 인력으로 양성해야 한다.

한국은 수혜국에서 원조국으로 발전한 특별한 나라다. 국제원조나 국제협력 필요성과 요구도 커지고 있다. 그런데 관련 내용과 방법은 개선 여지가 크다. 출발점은 수혜국의 이해를 반영한 지원 내용과 수준의 결정이다. 공급국가 중심으로 수립된 정부 전략을 수혜국 관점에서 전면 재검토해야 한다. 베트남 원조와 국제협력 분야에서 경쟁이 치열해지고 있다. 경쟁력을 가지려면 한국의 노동과 사회경제적 현실이 훌륭한 벤치마킹 대상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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