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석호 노동운동가

의리? 철들면서 ‘의리’라는 단어를 거의 입에 올리지 않았다. ‘남자’란 단어와 한패가 돼 여성을 비하하고 선을 긋는 데 주로 사용되는 단어였다. 부정행위를 저지른 집단이 폭로를 방지하려고 ‘배신’이란 단어와 묶어 사용하는 단어였다. 마찬가지로 폭력세계에서 즐겨 쓰는 단어였다.

‘의리’가 땅을 치면서 통탄할 얘기다. 의리의 뜻은 ‘사람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바른 도리’다. 그 뜻 어디에도 여성비하·부정행위·폭력세계 따위는 없다. 그럼에도 거의 쓰지 않은 점, 의리에게 미안하다.

한데 오늘은 제목부터 의리다. 최근 심장이 ‘진보와 운동의 의리’에 지배되고 있는 까닭이다. 명진이라는 한 스님 때문이다.

명진? 이름만으론 헷갈리는 이도 있다. 봉은사 주지를 하다 쫓겨난 스님이라면 다들 ‘아, 그 스님!’ 한다. 연일 언론을 도배한 사안이었다. 조계종 자승 총무원장을 포함한 이명박 일당이 쫓아냈다.

봉은사 주지가 어떤 자리인가. 봉은사는 대한민국 부자들이 사는 서울 강남의 최대 사찰이다. 자승처럼 제 잇속 챙기겠다고 악독하게 마음먹으면 속된 말로 한몫 두둑하게 챙길 수 있는 자리다. 그렇지 않더라도 직위만 적당히 유지하면 사회에서 존경받으며 행세할 수 있는 자리다. 대다수 스님들은 조그만 절의 주지라도 맡으려고 기를 쓴다. 주지 자리를 놓고 폭력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봉은사 주지스님 명진, 그는 조계종 최초로 불전함 관리를 신도회에 맡겼고 회계를 공개했다. 사찰 재정을 자기 주머니처럼 멋대로 주무르던 중들에겐 눈엣가시였다. 잘나가는 절의 주지스님 명진, 그는 자리에 연연하지 않고 세상의 불의에 맞섰다. 용산참사와 쌍용자동차, 강정과 밀양 등 고통받는 투쟁현장에 연대했고, 이명박의 거짓정치에 맞섰다. 바로 그것 때문에 쫓겨났다. 두 번째로 쫓겨난 거였다.

1987년을 살았던 이들, 87년의 역사를 배운 이들, 혹시 그것 아는가. 당시 개운사는 명동성당과 더불어 안전하게 독재타도를 외치던 성지였다. 집회가 끝나면 거리로 진출했다. 그 절의 주지가 명진스님이었다. 전두환 정권은 개운사에서 집회를 하지 못하도록 협박했다. 그러나 그는 개운사를 계속 개방했고, 함께 독재타도를 외쳤다. 그래서 그때도 주지 자리를 1년 만에 그만둬야 했다.

그랬던 명진스님이 조계종 적폐청산과 청정승가를 염원하며 단식에 들어갔다. 조계종 내부 금권선거, 은처승, 적광스님 집단폭행과 정신병원 입원, 언론탄압 따위 온갖 적폐를 바로잡기 위해서다. 그 정점에는 총무원장 자승이 있다.

그런데 진보와 운동 일각에서, 조계종 당사자 문제에 개입하는 걸 꺼린다는 얘기를 들었다. 속상했다. 엄밀하게 말하면 맞다. 당사자 문제다. 한데 그 잣대를 들이대면, 노동도 당사자 문제로 좁혀진다. 환경도, 여성도, 장애인도, 농민도, 노점상도…, 모든 것이 당사자 문제로 한정된다. 연대의 폭이 좁아진다. 이곳저곳의 적폐세력이 공통으로 들이대는 논리다. 한때 악명을 떨쳤던 제3자 개입금지 논리다.

조계종은 종교 울타리에 있지만, 엄연히 이 사회의 주요 구성체다. 내 몸 어느 한 부위에 생긴 암을 방치하면 온몸으로 퍼지듯, 사회 어느 한 부분의 적폐를 방치하면 전 사회로 퍼진다. 다른 적폐를 부추긴다. 결국 사회를 죽인다. 그랬던 게 지금까지의 대한민국 아니던가. 그래서 나라가 이 꼴 아닌가. 조계종 적폐 청산은 결코 당사자 문제가 아니다.

백기완 선생님을 비롯한 사회 원로들이 앞장섰다. 김중배·한승헌·김종철·이해동·함세웅·문정현·염무웅·고은·신경림·백낙청 등 한평생 올곧게 살아온 분들이다. 노동에서도 권영길·이수호·단병호 선생이 함께하고 있다.

노동·시민·민중운동 할 것 없이 한국 진보운동은 잘 안다. 어떤 단체든, 어떤 투쟁이든, 스님 명진, 그가 필요해서 그에게 손을 내밀면, 그는 두말없이 우리 손을 잡아 줬다. 육신이든 이름이든 기금이든 뭐든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의 든든한 벗이었다. 앞장서서 이명박근혜 일당에 맞선 연대의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런 그가 단식을 한다.

이제 우리가 손잡아야 하는 것 아닌가. 30년 넘게 우리 손을 잡아 줬던 명진스님에 대한 최소한의 의리 아닐까. 의리? 그렇다. 의리! 진보에도, 운동에도, 반드시 의리가 있어야 한다.

명진스님이 조계사 앞에서 단식한다. 지지방문·기자회견 뭐라도 함께해야 하지 않을까. 매주 목요일 저녁 6시30분 보신각에서 스님·불자·시민들이 ‘조계종 적폐청산 촛불법회’를 한다. 조계사까지 행진하며 적폐청산과 자승 구속을 외친다. 스님들과 불자들이 더 과감하게 나설 수 있도록 우리가 연대해야 한다. 23일 수요일 오전 11시엔 조계사 앞에서 '각계각층 시민사회 1천인 선언 기자회견'이 있다. 우리가 연대를 망설일 이유가 어디 있단 말인가.

노파심에 한마디 덧붙인다. 이런저런 눈치와 논리로 연대하지 않을 수는 있다. 아쉽지만 그 또한 존중한다. 그렇지만 혹여 자승을 명진스님 반열에 올리지는 말아 달라. 자승은 종교계 적폐의 우두머리일 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대표 적폐다. 명진스님은 한평생 민주주의에 헌신했고, 또 신음하는 민중의 투쟁현장에 함께한 사람이다. 둘을 동렬에 놓는 것은 우리 필요에 의해 오랫동안 손 내밀었던 한 스님에 대한 의리가 아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것은 진보의 도리도 운동의 도리도 아니다. 간곡히 호소한다.

노동운동가 (jshan8964@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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