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지원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정국이 혼란해지자 보수언론들이 경제위기론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들이 내세우는 프레임은 1997년이다.

경제침체는 97년 외환위기와 놀랍도록 흡사하긴 하다. 외환위기는 민주노총 총파업(96년 12월~97년 1월)→김현철 게이트(97년 1~2월)→국정 마비→부실기업 증가→미국 금리 인상(3월)→글로벌 유동성 증가→환율 정책, 기업 구조조정 미진을 거치면서 발생했다. 현재도 민주노총 총파업 투쟁, 정권 비리, 국정 마비, 미국 금리인상 준비, 조선·해운업 구조조정 지연, 신흥시장 글로벌 유동성 증가 등 비슷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당시와 비슷한 경제위기 상태에 처해 있는 것일까. 아니다. 당시와 현재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 먼저 가장 큰 차이는 재벌 대기업의 재무구조가 97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좋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삼성·현대그룹조차 부채비율이 300~500%나 됐다. 지금은 30대 재벌 부채비율이 일부를 제외하면 200% 미만이다. 특히 삼성과 현대차그룹은 부채비율이 단지 낮은 수준이 아니라 어마어마한 현금성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재벌들이 외환위기 이후 손실은 사회에 떠넘기고 이익은 내부화한 결과다.

97~99년 위기의 핵심은 재벌 대기업의 연쇄 부도였다. 지금 문제가 되는 건 이들의 부도가 아니라 이들만 더 많이 돈을 벌고 있다는 것이다. 연쇄 부도가 아니라 부의 독식이 문제다.

사상 최장 무역흑자로 외환보유고도 탄탄하다. 우리나라는 3천억달러가 넘는 외환을 가지고 있다. 97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다. 외환위기는 외환이 없어 대외채무를 갚지 못해 발생한다. 물론 한국 통화가 국제투기자본에 노출돼 있어 불안한 건 사실이다. 그렇다고 당장 외환위기를 거론하는 건 현실적이지 못하다.

물론 현재 경제 상태를 안정적이라고 이야기할 순 없다. 97년보다 안 좋은 조건도 있다. 무엇보다 세계경제상황이 그렇다. 97년에는 세계경제가 성장 중인 가운데 아시아 국가들이 위기에 빠졌다. 지금은 반대다. 세계경제가 극심한 장기 침체를 겪는 가운데 우리나라가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상황이다. 세계경제가 성장으로 반전될 가능성이 없으므로, 한국 경제 역시 좋아지기보다는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

또한 가계 경제 상황이 97년보다 안 좋다. 당시에는 8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상승한 임금소득 덕에 가계가 그럭저럭 괜찮았다. 그러나 현재는 외환위기 이후 장기간의 임금 정체와 자산가들의 불로소득 증가 탓에 가계 경제가 엉망이다. 사상 최대치를 잇따라 갱신하고 있는 가계부채가 대표적이다. 저소득층 가계부채가 매우 심각하다. 상환 능력이 없는 데다, 경제 침체로 소득이 증가할 가능성도 적기 때문이다.

현 위기를 세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 세계경제의 구조적 위기로 우리나라 경제 역시 좋아질 일은 없다. 둘째, 무역수지·외환보유고 등 수출재벌과 연관된 거시경제 지표는 상당히 안정적이다. 셋째, 수출재벌과 달리 저소득층을 중심으로 한 민생위기는 극단적으로 위태로워지고 있다.

요컨대 국민경제가 파탄 나는 경제위기는 아니지만 저소득층이 조용하게 죽어 나가는 민생위기가 현 경제 침체의 특징이다. 경제신문들과 보수세력이 이야기하는 97년 외환위기 프레임은 거리의 촛불을 위축시키면서, 동시에 실제 민생위기는 은폐하는 이중적 효과를 만들어 낸다. 보수세력이 경제위기론에 대한 대책으로 내오는 것이 재벌 대기업 구조조정과 노동시장 개혁인 것만 봐도 이를 알 수 있다. 지금 필요한 대책은 재벌 대기업의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가계부채와 소득감소 속에 조용히 죽어 나가는 수백만명의 저소득 노동자들과 자영업자들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요새 박근혜 퇴진 촛불집회에서 "재벌도 공범이다, 공범을 처벌하라"는 구호가 많이 나온다. 오늘의 경제 침체는 촛불을 더 태워 공범까지 처벌해야 해결된다.



노동자운동연구소 연구실장 (jwhan77@gmail.com)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