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호동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봉제공장 시다로 노동자 생활을 시작해 용접공과 어용노조 민주화 투쟁으로 해고된 한진중공업 30년 해고자. 해고자의 버거운 삶과 투쟁을 해학과 눈물샘을 터뜨리는 연설이나 교육으로 감동을 주는 활동가. 사실상 별도의 수사적 설명이 필요 없기도 한 이.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김진숙.

김진숙은 이땅에서 곤궁함이 특별하지 않던 1960년에 강화도에서 태어났다. 방직공장, 우유 배달원, 신문 배달원, 버스 안내양, 용접공 등의 고된 노동자로 청춘기를 살았다. 이제는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이 추억하고, 그가 증언하는 방직공장 여공과 버스 안내양 등의 노동조건은 김진숙의 교육에서 재미와 눈물을 동시에 선사하는 추억담이 되고 있다. 그 시절 어느 날 TV에서 용접공 아주머니들의 활약상을 본 후 김진숙은 용접노동자로 재탄생하게 된다. 1981년 한진중공업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했다. 당시 조선사의 현장 노동조건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열악했고 노동조합은 유명무실했다. 열악한 작업환경에서 수시로 목숨을 잃는 산업재해는 동료 노동자들에게도 무덤덤한 일상이 될 정도였다. 하긴 그렇게 해야 죽음의 공포를 이겨 낼 수 있는 현장이었으리라. 20대 피끓는 여성 용접노동자가 살던 작은 방으로 퇴근하는 길에 늘 단란한 모습이었던 세 아이 아빠의 산재사망 사고와 그 처리과정은 그의 의식 전환에 큰 계기가 됐다고 한다.

군부독재 치하의 노조민주화 투쟁은 절박한 현장 문제들을 변화시키려는 현장노동자들의 처절한 분노로 촉발됐고, 1986년 어용노조가 판을 치는 조선소에서 20대 여성노동자의 대의원 출마는 자본에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진숙은 ‘빨갱이’취급을 당하며 해고됐다. 현장조합원들의 열광적인 지지 속에 민주집행부가 출범했다. 현장의 노동조건은 빠르게 개선됐고 민주노조의 힘찬 활동이 지속됐지만 해고자 김진숙의 복직만은 쉽지 않았다.

90년대에 접어들면서도 기약 없는 복직투쟁을 전개하던 김진숙은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이후 최초의 자주적·민주적·계급적 노동자 전국조직인 전노협 설립의 감격을 함께했다. 91년 5월 구속상태에서 박창수 한진중공업노조 위원장이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에 김진숙과 전국 노동자들은 정권과 자본의 탄압에 치를 떨며 분노했다. 군부독재 타도 투쟁 과정에서 안타까운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던 그해 봄 최루가스 자욱했던 가투 현장에서 필자도 김진숙의 존재를 어렴풋이 듣게 됐다.

95년 민주노총 출범과 함께 김진숙은 부산본부 지도위원을 맡아 더욱 치열한 운동적 자세를 견지하게 된다.

한진중공업노조의 민주노조 사수와 구조조정 저지 투쟁은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도 끝을 모르고 진행됐다. 이 투쟁의 과정에서 2003년 김주익·곽재규 두 분의 열사투쟁이 진행됐고 김진숙의 분노에 찬 통곡과 투쟁은 호흡 조절할 틈조차 없는 듯했다. 발전노조 민영화 반대 파업에 힘차게 연대했던 한진중공업지회의 투쟁에 발전노조 조합원들과 승리를 위해 연대하면서 먹먹했던 느낌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기억이다. 열사 장례식이 진행됐던 부산역에서 눈물 가득한 김진숙 지도위원의 절절한 조사는 자본천국 시대의 잊지 못할 선동문이요, 명연설로 남았다. 이후 다시 한진중공업지회의 처절한 투쟁이 재개될 때까지 김진숙 지도위원의 해고자 활동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그의 교육은 민주노조운동에서 수강 필수의 중요한 과정으로 인식됐다. 여러 차례 들었던 필자도 들을 때마다 활동의 결의를 새롭게 다지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한진중공업에 정리해고의 칼바람이 불면서 김진숙은 단식과 그 유명한 85호 크레인에서 목숨을 건 고공농성 투쟁을 전개하게 된다. 김주익과 김진숙을 고공으로 올라갈 수밖에 없도록 했던 투쟁과 조직의 내외적 조건은 유사했다.

하지만 김진숙의 투쟁은 처절했던 해고자로서의 삶과 투쟁이 SNS 등을 통해 알려지고 투쟁의 내용이 전파되면서 부산행 희망버스가 발차하고 전국적인 투쟁으로 전환됐다. 그가 고공에 올라간 지 얼마 안 돼 85호 크레인으로 달려갔던 필자는 되돌아 나올 때의 절망감을 잊지 못한다. 이후 희망버스에 동참하고 확대되는 것을 보면서 농성일수는 늘어나지만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한진중공업 69명 정리해고자에 대한 중앙노동위원회 재심사건에서 노동자위원을 직접 맡아 심문회의와 회의장 점거 농성을 통해 어렵게 교섭 성사를 시키면서 조금 더 희망적 기대로 나아갔던 기억이 있다. 김진숙과 한진중 조합원들은 결국 민주노총 조합원들과 폭넓은 사회적 연대를 통해 승리했다. 85호 크레인 고공농성 309일 만이었다. 합의 이행과정은 더욱 고통스러워서 한진중공업에서 네 번째인 최강서 열사의 안타까운 죽음까지 거치며 해고자들은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김진숙은 변함없이 해고자로 남았지만.

한진중공업 민주노조 역사 30년. 구속과 목숨을 건 투쟁의 소금꽃나무 김진숙의 해고생활 30년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그림자들의 섬’이라는 다큐멘터리 영화가 됐다. 8월25일에 개봉한다. 며칠 전 시사회에 참석해서 지난 30년의 한국노동계급 상태 변화와 민주노조운동의 역사를 회상했다. 벅찬 감동과 회한의 눈물을 가슴으로 흘렸다. 많은 분들이 꼭 보시기를 권한다. 조합원과 노동자, 시민들의 노동교육에도 쓰임새가 최고다. 평소 존경하는 30년 해고노동자는 소리 없는 호통같은 영화 마지막 대사로 진한 여운을 남겼다.

“전 우리 조합원들을 믿어요. 끝까지.”

노동자투쟁연대 대표 (hdlee2001@empa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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