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텁지근한 날씨 탓인지 요새 부쩍 악몽을 꾸다가 깨어나는 일이 잦다. 허탈한 블랙코미디부터 무시무시한 스릴러까지, 변화무쌍한 악몽에서 깨어나 보면 가끔은 악몽이 꿈이었는지 깨어난 지금이 꿈인지 혼란스럽다. 하지만 이러한 '호접지몽'의 책임이 온전히 나에게만 있다고 하기에는 좀 억울하다.

더위와 악몽 탓에 멀리 달아난 잠을 뒤로 하고, 장마철 새벽 공기를 잔뜩 머금어 눅눅한 조간신문을 펴 든다. 신문 속에 담긴 세상은 현실일까 악몽일까. 성과와 효율 속에 사람이 죽고 삶이 사라지는 광경, 책임과 품격 대신 면피와 야만이 뒤덮고 있는 지면을 보고 있노라면, 차라리 이것이 다 꿈이었으면 싶다.

악몽 같은 현실을 뒷받침하는 논리는 자못 튼튼해 보인다. 기업이 살아야 경제가 살고, 일자리가 늘어나 고용이 증가하며, 임금의 지급은 부의 재분배 효과를 일으켜 다시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기업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성과에 대한 엄격한 평가가 필요하고, 성과를 극대화시키기 위해서는 경쟁이 필요하며, 저성과자들은 적절한 '인적 자원'이 아니므로 관리가 필요하고 최종적으로는 도태의 대상이라는 이야기도 익숙한 시나리오다. 경직적 고용시장은 기업의 효율적 인력관리와 유연한 구조재편을 어렵게 하는 암적 존재라고 평가된다. 노동조합의 단결권과 단체행동권은 법적 대응을 통해 와해시키거나 무력화시켜야 할 대상인 것처럼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실의 논리들은 이미 상당부분 사실과는 다르거나 무관하다는 점이 드러나고 있다. 낙수효과의 근거는 미미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고, 기업은 많은 경우 자신의 부를 재분배하기보다 유보한다는 사실도 실증적으로 확인됐다. 성과와 효율로 평가될 수 없는 노동력의 지표들이 다수 확인되기도 했다. 서구와 같이 충실한 사회보장제도를 갖추지 못한 우리에게 유연한 고용은 유연한 해고와 다를바 없고, 노동조합의 운영을 방해하는 부당노동행위는 규범적으로도 형사처벌의 대상이다.

우리는 악몽을 꾸면서 확인하게 되는 꿈속의 설정이나 상황에 대해, 꿈속에서는 아무런 이질감이나 의문을 갖지 않은 채 당연한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악몽에서 깨고 나면, 그 모든 것이 어느 모로 보더라도 이상하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당황했던 기억들을 가지고 있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현실의 논리들은 당연한 것도 아니고, 그 근거가 충분한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그러한 논리의 적절성을 평가해 보거나 구체적으로 판단해 볼 기회를 충분히 갖지 못했고, 그러한 질문들 자체가 불필요하다고 여겨지는 사회 속에서 생활해 왔을 뿐이다.

우리는 어느 고위공무원의 생각과는 달리, 개나 돼지가 아니라 사람이다. 악몽 같은 현실을 끊어 내기 위해서는, 우선 현실을 악몽처럼 만들었던 현실의 논리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 현실의 논리를 대면하는 과정에서 노동자는 노동자의 기준과 관점을 분명하게 가지고 판단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불변의 진리라 생각했던 것들은, 기실 노동자들의 이익보다 자본과 사용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논리일 뿐이었던 것은 아닌지 철저하고 고집스럽게 따져 물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이 악몽과 현실의 호접지몽을 끊어 내는 첫 발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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