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용원 노무사(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법률원)

법률원에서 노동자들을 만나다 보면 가끔 공감을 넘어 그의 처지에 놓일 때가 있고 그래서 더 악착같고 억울한 기분까지 빙의되곤 한다. 지난해 가을에 만난 노동자 한 분은 내성적이고 순응적이면서도 가끔 울화가 치민 듯 화를 토해 내곤 했다.

대학원에서 중국어를 전공한 그는 대학 시간강사와 비정규직 일자리를 맴돌았다. 그러던 중 어렵게 특채로 공공기관 정규직으로 취업했다. 정말 날아갈 듯이 기뻤다고 한다. 천운으로 합격했다며 기뻐했고 그동안 시간강사와 계약직을 전전하면서 느꼈던 설움을 잘 알기에, 또한 늦은 나이에 막 결혼해서 생계가 막막했기에 이 직장이 얼마나 소중하고 고마웠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리고 아마도 안정적인 직장에서의 앞날을 도모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바람은 현 정권 아래서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입사하고 처음 3년간은 큰 과오 없이 맡은 업무를 성실히 수행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으로 연구를 직접적으로 수행하지는 않았지만 마치 기관의 윤활유와 같이 연구를 지원하는 연구행정업무를 담당했고, 개중에는 기관에서 처음으로 시도한 업무도 있었다. 일이 힘들기는 했지만 그만큼 성과도 뒤따라오다 보니 일할 맛이 났다고 한다.

안타깝게도 행복한 순간은 거기까지였다. 새롭게 기관장이 낙하산으로 부임하면서 그의 고유한 업무영역은 사라지고 기존 연구원들과 같은 업무를 맡아야 했다. 당시에는 이것을 부당한 지시라고 느꼈지만 순응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이참에 연구 분야도 배워 볼 겸 보무도 당당하게 연구직 업무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과는 참담했다. 내리 2년간 D등급을 받았고 급기야 직군까지 전환되는 등 좌천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저성과자로 낙인찍혀 직위해제 처분에 이어 3개월간 골방에 방치된 채 면직까지 당했다.

이 사건은 지난해 말 불거진 공공기관의 저성과자 퇴출 문제와 맞닿아 있다. 세간의 관심이 쏠리던 시기였고, 이 사건에 대해 서울지방노동위원회는 직위해제는 물론 해고도 정당하다고 봤다. 골방에서 근로자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참으로 어처구니없었다. 초심 지노위 판정 결과를 보며 저성과자 해고를 막아 내지 못한 나 역시 저성과자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그와 내가 빙의되기 시작했다.

근로계약 관계는 일정한 성과를 내야 하는 도급계약과 다르다. 단지 사업장에서 일정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책임을 근로자에게 돌릴 수는 없다. 또한 사용자의 지휘·명령에 종속돼 일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지위를 간과해서도 안 되고 오히려 적절한 배치를 통해 근로자의 능력을 끌어내지 못한 사용자의 책임도 따져 물어야 한다.

결국 이 사건은 중앙노동위원회에서 보기 좋게 뒤집어졌다. 사용자의 잘못된 인사정책에서 비롯된 직위해제 처분과 함께 해고에 이르기까지 골방에 가둬 둔 것 외에 사용자가 노력한 바 없었다는 이유로 해고까지 부당하다고 판단했다. 어쩜 너무나 당연한 결과지만 그런 결과를 얻기까지 노동자가 감내해야 하는 고통은 너무나도 컸고 힘겨웠다. 중앙노동위 판정이 있은 후 기관장은 내부게시판에 자신은 이 결과에 승복할 수 없어 행정소송까지 갈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자신의 임기가 올해 마무리되지만 다음에 오는 기관장이 해당 소송을 이어 가길 바란다고 적었다. 무슨 심보인지 모르겠다.

내 생각은 이렇다. 이번 사건의 최대 책임자는 기관장이고 그는 분명 저성과자임에 틀림없다. 잘못된 인사 정책에 의해 지금까지 막대한 행정력과 금전적 손실을 기관에 끼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기관장은 이번 결과로 인해 어떠한 책임을 감당할까. 아마도 노동조합이 그런 기관장의 독선을 견제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곪아 터지진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전공과 능력, 적성에 상관없이 일할 수 없는 부서로 맘대로 전보를 보낸 뒤 고과를 낮게 줘서 합법적으로 찍어 낼 수도 있구나를 느꼈다.”

면접 당시 하소연하던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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