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또 한 세상이 사라졌다. 순번을 정하지 않은 시한폭탄 돌리기. 생의 마지막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대체 불가인 누군가의 마지막은 유일하다.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비열하고 냉정한 자본의 탄압으로 살아갈 마지막 기력조차 빼앗긴 채 절벽 끝까지 떠밀려 속절없이 무너진 노동자들의 피투성이 삶이 도처에서 서글프다. 금속노조 유성기업 영동지회 한광호 조합원의 비보를 들으면서 이제는 이름조차 가물가물한 많은 열사들을 함께 떠올리며 언제까지 나는 머리 조아려 먼저 가신 님들을 추도만 할 것인가 속이 탄다. 더불어 사는 좋은 세상 만들자고 앞장서 맘 내고 몸 부린 이들이 희생되는 현실을 이대로 두고 무슨 비정규직 철폐며 노동해방이란 말인가. 더 이상 면피용 알리바이로 활동하지 말자.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건 차치하고라도 내 곁의 동료와 동지를 지키지도 못하는 무력한 활동을 쇄신하는 노력이 이렇게 절실할 때가 있었나. 출구 없는 상념이 머릿속을 맴돈다.

선진국 그룹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이자 무역 규모 8위 경제대국 반열에 오른 2016년 대한민국. 하지만 1인당 국민소득 3만달러를 앞둔 나라에서 최대 공동체 성원인 노동자들의 삶은 우울하고 참담하다. 평등까진 아니더라도 조금만 더 나누기만 해도 자기 생을 스스로 버릴 사람은 없을 나라에서 너무 많이 죽고 너무 많이 다치고 너무 많이 상처받고 고통받는다. 비정규직 문제가 가장 중요한 사회적 선결과제로 대두됐음에도 실질적 해법을 찾지 못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암울한 대한민국의 자화상이다. 역사의 고비를 넘고 넘어 당도한 곳에서 우리 모두는 디스토피아에 훨씬 가까운 현실과 맞닥뜨려 곤혹스럽다. 후세대에게 물려줄 세상은 갈수록 함께 사는 사회가 아닌 약육강식 정글에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함께 살자’가 우리 시대 화두가 된 지 오래다. 그런데 비정하고 살벌한 천민자본주의가 바뀔 기미가 좀처럼 안 보인다. 오히려 절망이 양산되면서 사회적 타살이 일상화되고 있다. 특히 노동의 가치가 홀대받고 있고 헌법상 기본권인 노동 3권은 그림의 떡이 되고 있다. 노동인권 사각지대 확대는 정부와 지자체의 행정력으로 감당하기 힘든 지경에 와 있다. 최대 기업군인 삼성그룹 내에서 무노조경영이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기막힌 현실이 기울어질 대로 기울어진 노사 역관계를 명징하게 방증한다. 창조컨설팅 같은 불법적 노조파괴 전문가집단이 횡행해도 처벌은 경미하다. 극단적인 불평등과 사회 양극화 심화는 무시로 인간관계를 파탄 내고 있다. 한국 사회는 사람의 목숨과 안전보다 자본의 이윤과 수익이 압도적으로 중요한 물신숭배로 획일화되고 있다. 이대로는 공멸이 불가피하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희망의 참호를 하나씩 더디게라도 만들어 가야 할 때다. "위기는 낡은 것은 죽어 가고 있는데 새로운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은 상황"이라는 그람시의 말처럼, 한국 사회는 심각한 위기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과단성 있게 새로운 희망을 찾지 못하면, 정규직-비정규직 할 것 없이 노동자들은 서로가 적대하며 사면초가로 치닫게 될 것이다. 일상의 노동으로 한국 사회를 떠받치고 재생산을 해 온 노동자들이 가장 큰 희생양으로 무자비하고 탐욕스런 자본의 제단에 바쳐지고 있다. 뭐든 어디서든 돌파구를 열어 가야 한다. 더 이상 미뤄선 안 된다. 엄두를 내기 힘든 사람의 일이 그렇듯이, 준비가 부족하더라도 진심 어린 결기와 열정으로 새 길을 열어 가야 한다.

당장 우리 사회의 현재와 장래를 결정할 힘을 가지고도 희화화되고 지탄의 대상이 돼 버린 정치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낡고 고루한 보수양당 체제에서 한국 사회의 활력은 질식 직전까지 왔다. 결국 모두를 파멸시킬 자본독재에 파열구를 내기 위해선 올곧은 정치가 가장 강력한 무기다. 4·13 총선을 앞두고 일당독재에 가까운 새누리당 텃밭인 경주에 용산 참사 학살진압 주범 김석기 심판을 자임하며 출마를 결단한 노동인권 변호사 권영국의 선전을 많은 이들이 기대하고 응원하는 이유다. “함께 살자! 정치혁명!” 불가능해 보이지만 절박한 시대정신이 담긴 슬로건이다. 이걸 이루지 않고 노동자가 우리 사회의 중심으로 진입할 방도는 없다. 죽음이 드리운 시대, 무엇보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정치의 본령 아닌가. 간만에 남도 변방에서 새로운 희망의 싹이 트고 있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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