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시절 국사교과서의 첫 장을 장식한 것은 ‘국민교육헌장’이었다.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교과서엔 내가 태어난 이유가 분명히 있었다. 적어도 국사 시간엔 프랑스 소설가 알베르 까뮈의 ‘이방인’은 끼어들 틈이 없었다. “우리는 누구이고, 어디서 왔고, 어디로 가느냐”라는 질문은 허용되지 않았다. 역사를 배울 때 흔히 하는 이런 질문은 사치가 돼 버렸다. 우린 모두 민족 구성원이었다. 그래서 나아갈 바도 명확했다.

“길이 후손에 물려줄 영광된 통일 조국의 앞날을 내다보며, 신념과 긍지를 지닌 근면한 국민으로서, 민족의 슬기를 모아 줄기찬 노력으로, 새 역사를 창조하자.”

국민교육헌장은 무조건 외어야 했다. 그래야 국사 수업이 시작됐다. 한 대목이라도 놓치면 어김없이 회초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필자가 보낸 80년대 교실 풍경이다.

박정희 정권은 74년 국사교과서를 국정체제로 전환했다. 유신을 선포한 후 국사 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에서다. 이른바 ‘3차 교육과정’의 제정이다. 국사교과서에 ‘태극기에 대한 맹세’, ‘국민교육헌장’이 실린 것도 이 시점부터다. 국사교과서에 수록된 5·16 군사정변은 ‘의로운 군인들의 혁명’으로 미화됐다. 산업화와 경제성장은 칭송하고, 민주주의와 인권 유린은 은폐됐다. 전두환 정권 출범 후 82년 4차 교육과정이 제정됐지만 국사교과서는 박정희 정권의 기조와 다르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정의로운 사회 구현’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자신들이 주도한 12·12 군사정변을 정당화했다. 5·18 광주민주화항쟁은 폭도들의 시위로 변질시켰다. 그야말로 군인정권은 자신의 입맛대로 국사교과서를 왜곡한 셈이다.

정권 홍보에 치중한 박정희·전두환·노태우 군사정권의 국사교과서에서 노동문제는 어떻게 다뤄졌을까. 한 마디로 ‘노동자’와 ‘노동’은 흔적조차 없었다. 주체적인 의미로서 노동자라는 개념은 사라지고, 근면하고 순종적인 의미의 근로자로 대체됐다.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 대통령의 치적이었고, 경제성장의 주춧돌을 놓은 노동자는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며 산화한 전태일 열사와 청계피복노조, 반도상사·동일방직·원풍모방·YH무역 민주노조의 투쟁은 실종됐다. 야만과 탄압의 시대에 솟구쳐 나온 구로공단 동맹파업 등 80년대 노동쟁의도 외면됐다. 마치 우리나라는 노동운동도 노동쟁의도 없이 평화롭게 산업화 과정을 밟은 것 인양 그려졌다.

노동조합을 지워 버린 70~80년대 국사교과서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이후부터다. 하지만 2002년 7차 교육과정에 와서야 비로소 노동운동이 비중 있게 다뤄졌다. 국정교과서에서 국·검정 혼합체제로 전환되면서 이러한 변화가 시작됐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국사교과서는 완전 검정체제로 바뀌었다.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노동자들은 노동자의 생존권 쟁취 운동, 노동조합 설립 운동 등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박정희 정부는 노동자의 노동 3권을 크게 제한하여 노동운동을 탄압하였다. 급기야 1979년에 야당(신민당) 당사에서 생존권 보장을 요구하며 농성하던 YH무역 여성 노동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가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7차 교육과정에 따라 국정교과서로 발행된 중학교와 고등학교 1학년 국사교과서에 실린 내용이다. 이전보다는 노동운동에 대한 내용이 늘었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분량이다. YH무역노조 사건은 “유신체제 몰락의 한 원인”이라는 평가도 포함됐다. 적어도 노동운동에 대한 심각한 왜곡은 줄어든 셈이다. 검정체제로 발행된 고등학교 2~3학년 국사교과서에는 더 진일보한 내용도 실렸다. 물론 국사교과서에 실린 노동운동은 여전히 축소됐거나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박근혜 정부가 2017년부터 국정 국사교과서를 발행한다고 발표했다. 정부와 새누리당은 “국사교과서에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와 경제성장이 부정적으로 평가됐다”며 국사교과서를 바로잡겠다고 벼르고 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찬양으로 점철된 유신 국사교과서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태세다. 국사교과서에 실린 전태일 분신사건, YH무역 등 민주노조의 기록마저 없애겠다는 모양새다. 국사교과서는 정권교과서가 아니다. 살아있는 역사를 배워야 할 우리 아이들에게 또다시 노동운동이 배제된 역사, 죽은 역사를 주입해서야 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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