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남신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노동개혁이 화두다. 대통령이 앞장섰다. 집권여당의 대표가 총대를 멨다. 처음엔 노동시장 구조개혁이라더니 노동시장 개혁을 거쳐 어느새 노동개혁으로 귀착됐다. 치밀한 개념 치환이다. 정부와 새누리당의 이데올로그들이 참 영악하다. 개악을 슬그머니 개혁으로 바꾸더니 노동시장에서 시장을 교묘하게 떼어 놓았다. 시장의 주인은 자본가들이고 대다수 노동기본권이 박탈된 노동자들의 생사여탈권도 재벌을 비롯한 슈퍼갑들이 쥐고 있는데, 시장이라는 레토릭이 사라지는 순간 노동시장 양극화의 압도적 주범인 자본가들의 책임도 증발한다. 마술처럼 기막힌 사기다.

정리해고와 구조조정, 비정규직 양산을 노동유연화라는 미명으로 포장했듯이 박근혜 정부는 노동시장 구조개악을 노동개혁이란 약칭으로 뒤바꿔 작심하고 정규직 노조(특히 민주노총)를 정조준해 공격하고 있다. 양대 노총의 핵심인 대규모 정규직 노조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제대로 못하고 있는 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과연 그들이 노동시장 양극화와 비정규직 양산·확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일까. 이건 중요한 문제이므로 찬찬히 따져 봐야 한다.

결국 프레임이 문제다. 어떤 관점과 인식의 창을 통해 들여다보느냐에 따라 문제의 원인진단과 해법이 달라진다. 미증유의 외환위기 이후 가장 큰 고통을 감내하면서 위기 극복의 희생양이 됐던 노동자들이 문제인가, 천문학적 초과이윤을 빨아들이면서도 사회적 책임과는 담을 쌓은 채 땅콩회항의 갑질과 무시로 벌어지는 재산권 다툼으로 온 국민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드는 재벌이 문제인가. 한국 사회를 바꾸기 위해 어느 집단에게 먼저 책임을 추궁해야 하나. 당연히 재벌이다. 노동개혁이 아니라 재벌개혁을 먼저 논의해야 한다. 오늘날 핵심 선결과제로 떠오른 노동시장 양극화와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려면 전도된 프레임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재벌 왕국에 가깝다. 정치민주화의 과실이 고루 분배되지 못한 채 특정 기득권 집단에 집중된 결과다. 경제민주화로 민주화가 심화하고 진전되지 못한 채 재벌로 표상되는 경제권력이 한국 자본주의를 승자독식과 무한경쟁의 정글로 만들어 버렸다. 군사독재정권의 특혜와 대다수 국민의 기여로 성장한 재벌은 자신의 사회적 책임을 헌신짝처럼 내다 버렸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한탄처럼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무소불위의 힘으로 초법적 권위를 누리는 대자본 재벌, 상당한 수준으로 발달한 자본주의 사회인 한국에서 전근대적 섬으로 자신의 지위를 고수하고 있는 재벌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국 사회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본주의의 최대 다수 집단은 노동자다. 노동자 삶의 질이 그 사회의 평균적인 행복지수다. 보통 사람의 행복을 다른 말로 바꾸면 무엇보다 평범한 노동자들의 행복에 다름 아니다.

헌법 제33조에 노동 3권을 국민기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것도 사회적 약자이면서 우리 사회의 중추인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해서다.

노동기본권을 경제성장 목표의 부속물로 여기는 철학과 사고방식에 기반한 낡은 프레임으로는 노동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없다. 재벌자본의 책임을 면죄하는 방패막이로 정규직 노조를 앞세우는 못된 관행은 즉각 중단돼야 한다. 공익적 관점에서 자신의 책임을 다해야 할 정부가 재벌 편에 서서 조직노동을 공격하는 모양새는 아무리 봐도 남우세스럽다. 우리나라 노동 문제를 해결하려면 재벌에 복속된 정치가 재벌 위에 바로 서야 한다.

노동시장 이중구조 문제는 재벌자본의 수탈에 의한 노동자 빈곤계층 확대가 핵심 내용이다. 10대 그룹의 사내유보금이 504조원에 이르고 삼성그룹 하나만으로도 200조원에 육박하는 기막힌 현실을 왜 모른 체하는가. 갈수록 악화하는 노동소득분배율과 쉽사리 개선되지 않고 있는 비정규직 문제의 근원에 불법·탈법·편법을 총동원해 이윤극대화를 실현해 온 재벌자본이 똬리 튼 채 구조개선을 가로막고 있는 형국이다.

한국 자본주의 계급모순의 한 축으로 역사적으로나 구조적으로 가장 많은 수혜를 독점한 재벌자본을 제어해야 한다. 재벌자본의 온당한 사회적 책임을 강제하지 않고선 민간부문에서 변화를 기대하는 건 우물에서 숭늉 찾는 꼴이다. 노노 갈등을 조장하는 노동개혁과 세대 대립을 부추기는 임금피크제보다 재벌개혁이 우선이다.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소장 (namsin1964@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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