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88만원 세대’ 책이 많이 팔린 적 있다. 열악한 소득을 받는 사람들이 모든 연령대에 고루 흩어져 있는 현실에도 불구하고 젊은 세대와 동의어로 쓰이다 지금은 사라졌다. 초점을 ‘88만원’보다 ‘세대’에 맞춤으로써 저소득-장시간 착취에 신음하는 취약계층 담론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정규직 일자리를 얻지 못한 젊은이들, 특히 4년제 대학 나와 알바를 전전하는 고학력 청년층을 대변하는 말로 쓰였다.

그즈음 청년유니온이니 알바노조니 하는 단체들이 유명해졌다.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산하 지역본부들은 자신들이 했어야 할, 주유소나 커피숍·햄버거가게에서 일하는 취약계층을 보호하고 조직하는 데 실패했다. 뭔가 했는데 실패했다기보다 별로 한 게 없는 무능함을 보여 줬다. 그 틈을 청년단체들이 파고들었고, 참신한 기획과 활동으로 여론의 주목을 받았다. 청년단체들이 잘했지만, 기존 노조운동이 못한 측면이 크다. ‘88만원 세대’가 2007년 출판됐으니 십 년 다 돼 간다. 책은 젊은 ‘세대’가 혁명에 나서라 선동했지만 아직 달라진 게 없다. 빈곤-착취와 억압-소외는 구조적으로 세대가 아닌 계급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흥은행이 충북은행-강원은행과 합병을 거쳐 신한은행으로 넘어가던 무렵이다. 일방적 구조조정에 반대하던 노조가 투쟁에 들어갔고, 민주노동당 젊은 상근자들이 지원을 나갔다. 이십대 상근자들이 들고 있던 구호판엔 조흥은행 노동자들의 고용을 불안하게 만들고 생계를 파탄 내는 구조조정에 반대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원외정당이라 상근자들이 4대 보험도 없었다. 월급은 50만~60만원 정도. 그런 청년 활동가들이 자신보다 10배 많은 월급 받고 사회보험에 더해 빵빵한 기업복지를 누리던 대형 은행 정규직의 고용불안을 걱정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너네 4대 보험부터 챙기는 게 어떻냐”는 말을 꺼냈다 된통 당했다. 그때 이십대였던 상근자는 애 엄마가 됐고 이제 마흔을 바라본다. 민주노동당이 깨질 때 진보신당에 합류한 그는 비정규직당을 만들려 열심히 했지만, 비정규직 권익 대변은커녕 당 자체가 뒤안길로 사라졌다.

뿌리를 민주노동당·진보신당·국민참여당에 둔 정의당 지도부 선거에서 ‘진보정치 2세대론’이 나왔다. 진보정치에서 ‘1세대’의 시대를 보내고 ‘2세대’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말이다. 젊은 세대가 더 많이 당원이 되고, 지도부가 되고, 상근자가 되고, 의사결정을 하고, 당 중심이 되고, 진보정치의 중심이 돼야 한다는 취지엔 백 프로 공감이다.

하지만 ‘세대’론은 현실적·과학적 전망을 흐리는 문제가 있다.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에 이어 통합진보당까지, 21세기에 등장했던 진보정당들이 사라진 데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정파 갈등, 비현실적 노선, 아마추어 당 운영, 실력 부족, 지도력 부재, 조직 권위의 붕괴, 정권의 음모와 탄압….

민주노동당 전신 국민승리21 무렵 이십대로 진보정당 활동을 시작한 이들은 이제 사십대를 넘어선 지 오래다. ‘2세대’론을 내세운 조성주 후보의 나이 삼십대에 그 시절을 보낸 이들은 이제 오십 줄이다. ‘1987년 체제’의 세례를 이십대에 받고 진보정당 운동에 투신한 젊은이들은 이제 사오십 줄이 됐다. 고졸 출신도 있지만 대부분 대졸인 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무렵은 한국 자본주의 전성기였고 쉽게 취직해서 정규직이 될 수 있던 시기였다.

하지만 이들은 묵묵히 때론 시끌벅적 진보정당 운동에 젊음을 던졌다. 열악한 임금과 장시간 노동, 사회보장 부재에 시달리며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진보신당-통합진보당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교수나 변호사 같은 자격증을 따 둔 이들이나 일류대를 나와 쉽사리 좋은 직장을 갈 수 있던 일부는 당이 망하면서 수입이 늘고 생활이 윤택해졌지만, 그럴 능력과 주변머리가 없던 대부분은 지리멸렬 살고 있다. 그 와중에 가정도 꾸렸다.

정의당 당대표선거에서 ‘노심’으로 대표되는, 그리고 진보통합을 둘러싼 논란으로 노동당 수장을 사퇴한 나경채 대표와 그 당 핵심도 끼어 있는 ‘진보정치 1세대’의 역사는 철부지 시절 “역사가 부여한 임무에 복무하고 시대와 더불어 기꺼이 사라질 것을 결의”했던, 지금은 구닥다리가 된 사오십대의 구질하고 비루한 인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노선과 이념을 떠나 이들의 희생과 헌신, 열정과 환희, 슬픔과 실망, 패배와 포기가 지금 우리가 누리는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토대가 됐음을 부정할 수 없다. 앞으로 십 년은 잘되든 못되든 여전히 ‘진보정치 1세대’의 시대가 될 것이다. 세대라는 개념을 생물학적 나이를 넘어 사회적 과제와 시대적 의무까지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장할 때 그렇다는 말이다. 서로를 격려하며 신발 끈을 더욱 조일 때다.


아시아노사관계컨설턴트 (webmaster@labor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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