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형동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꼭 10년 전 한국노총 충주지부 의장 김태환 열사가 순직했다. 마흔이 채 되지 않은 나이에 어린 딸과 부인을 두고서 말이다.

김태환 열사 사망사건은 개인적으로는 필자가 한국노총에서 처음 맡은 사건이기도 하다. 기억하고 싶지는 않지만, 재판 준비를 위해 사고 당일 모습을 담은 영상을 수없이 되돌려봤다.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하기 위해서는 사고 상황을 잘 설명할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레미콘 노동자들의 파업에 맞서 사측은 대체운전자를 사용했다. 운전이 미숙한 대체운전자는 조합원들이 차량을 에워싸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도 레미콘 차량을 그대로 진행시키고 도망쳤다. 물론 레미콘 차량이 그대로 진행하면 인명사고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사고 영상이 여실히 보여 주고 있다.

그런데 마침 그 집회·사고 현장에는 경찰들이 입회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담당 경찰은 차량을 제지하기는커녕 오히려 대체운전자에게 그대로 진행하라는 표시까지 했다. 조합원들의 집회를 무산시키려는 의도였으리라. 경찰의 손짓이 있은 후 곧장 열사가 차량에 빨려 들어가는 사고가 나고 말았다.

누가 보더라도 차량 운전자·회사·경찰이 책임을 져야 마땅했다. 특히 노동자의 생명과 노동권을 보호해야 할 경찰이 그 의무를 다하지 않은 것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이었다.

김태환 열사는 누구도 쉬이 나서려고 하지 않는,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조직된 노동조합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자들을 위해 희생했다. 그래서 ‘열사’라는 칭호가 가볍지 않다.

2005년 당시 우리 사회는 비정규 노동자 문제가 악화일로에 있었다. 기간제·파견·외주 등 이름도 생소한, 전에는 경험하지 못한 전혀 새로운 노동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특수형태근로종사자(특수고용 노동자) 또한 만만치 않은 증가 추세를 보였다. 특수고용 노동자는 레미콘·관광버스·중기 건설기계 사업장에 많았다.

지역 특성상 충주지역에는 레미콘 운전에 종사하는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상당했다. 자신들이 노동자인지, 노동자로서 어떤 노동법의 보호를 받는지 이들은 잘 알지 못했다. 그들이 노동자로서 당연히 누려야 할 노동권이 있음을 일깨워 주기 위해 열사는 이들이 있는 곳이면 언제나 먼저 다가갔다.

따지고 보자면 조직화된 정규직으로서, 지역 대표자로서 안주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머무르지 않았다. ‘더 낮은 곳을 향하는’ 노동운동의 진면목을 실천해 보였다.

6월14일이면 그가 떠난 지 꼭 10년이 된다. 열사 정신을 이어받겠다고 선언한 지 10년, 그동안 나름 적지 않은 성과가 있었다. 작게는 2006년 김태환 열사를 기리고 그 정신을 이어 가고자 기념사업회(사단법인 김태환기념사업회)를 만들어 사업회를 중심으로 비정규 노동자를 위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무엇보다 열사 정신의 중심에는 비정규 노동자들에게 노동권을 되돌려주는 일이 있다. 한국노총은 이들을 위한 조직확대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레미콘에서 시작해서 덤프·로더 등 중기 건설기계 종사 노동자들까지 노동조합을 만드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지금은 고인이 된 비정규 담당 장진수 국장과 고흥·광양·보성 등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필요로 하는 곳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던 기억이 난다. 지금의 한국노총 건설산업노조의 모태가 됐다.

제도적으로는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본질적인 개혁은 아직 요원하다. 고용보험·산업재해 등에서 특수고용 노동자들을 위한 법률이 만들어지긴 했다. 그러나 특수고용 노동자들이 노동법상 노동자로, 노동조합으로 인정받지 못할 바에야 완전한 보호법이라고 할 수 없지 않는가.

앞으로 10년. 그때는 또 어떤 변화가 있을까. 희망해 본다. 특수고용 노동자라는 말도, 비정규 노동자라는 말도 너무 생소해서 10년 전 문헌을 찾아봐야만 하는 노동환경이기를. 김태환 열사의 희생에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다.

한국노총 중앙법률원 실장(변호사) (94kimhyung@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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