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소재 대학 4학년생 김준현(25·가명)씨는 요즘 종로3가 영어학원에서 강의를 듣는다. 강의가 끝나면 학원 근처 카페에서 영어공부에 몰두한다. 준현씨는 사실 스펙에 관심이 없었다. 중국어를 전공한 만큼 일찌감치 해외 무역회사로 진로를 잡았다. 실무경험을 쌓는 게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정부도 '탈스펙'을 강조했으니까.

준현씨는 곧 자신의 순진함을 책망해야 했다. 입사지원 서류를 채우려면 어차피 영어점수와 자격증이 필요했다. 준현씨는 "주위 친구들은 토익·토스·제2외국어 자격증·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증에다 추가로 자기 희망직종 관련 자격증까지 갖추고 있는데 난 영어점수조차 부족해서 걱정"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3~4월 기업 공채 시즌을 맞았지만 취업은 바늘구멍이다. 뾰족한 대책도 없다. 청년들은 자연 '스펙 올리기'를 택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달 등록된 신입 이력서 20만8천485건을 분석한 결과 토익 평균 점수는 738점에서 750점으로 올랐다. 800점 이상 고득점자 비율도 36.4%에서 40%로 높아졌다. 자격증 소지자는 79%에서 81.1%로 증가했다. 정부가 떠드는 "스펙 초월"은 먼 나라 얘기일 뿐이다.

상대평가 경쟁과 기업 갑질에 "내 탓이오"

취업난은 사회 문제인데 청년들은 왜 자기계발에만 힘을 쏟을까. 준현씨는 "뒤처진다는 공포 때문"이라고 했다.

"저만 못 따라가면 뒤처지는 거잖아요. 지금 상황이 부당한 건 다들 알죠. 그렇지만 기업이 어떤 요구를 해도 그 기준에 맞춰 들어갈 사람은 가잖아요. 당장 취업이 절실해지니까 다른 친구들에 비해 스펙을 덜 쌓은 걸 후회하죠. 다른 걸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1년6개월간 취업준비 끝에 최근 취업에 성공한 박상진(28·가명)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실기나 토론·면접 다 상대평가잖아요. 내가 이만큼 해도 남이 더 하면 소용이 없죠. 제대로 하고 있는 건지 항상 불안합니다. 친구들이 먼저 취업하면 만나기도 껄끄럽고. 자기 경쟁력을 높여서 빨리 취업하는 데 집중할 수밖에 없어요."

청년들이 자기계발 외에 택할 만한 길도 없다. 기업은 한정된 일자리를 쥐고 취업시장에서 갑질을 한다. 평가 기준과 권한·정보력을 독점한다. 절대적 '을'인 청년들은 무엇을 요구하기도, 어떤 문제를 제기하기도 어렵다.

언론사 취업을 준비한다는 이윤정(27·가명)씨는 기업이 불합격한 지원자들한테 이유조차 알려 주지도 않는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이씨는 "취업준비생은 언제, 왜 떨어지는지도 모르고 무작정 마음 졸이며 기다리기만 해야 한다" 며 "압박면접으로 상처를 받아도 '그때 내가 다르게 대응했어야 했나, 어쨌든 내가 마음에 안 들어서 나한테 그런 말을 한 거겠지'라며 내 탓을 하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털어놓았다.

박상진씨는 최종면접에서 '사상검증'을 당한 적이 있다. 당시 면접관은 "우리나라에 종북이 있다고 생각하느냐, 통합진보당은 종북이냐"는 식의 질문을 유독 비중 있게 했다. 소신에 따라 답변을 했는데, 합격 통보는 오지 않았다. 그 대답 때문인지 아닌지 알 수 없는 상진씨는 자기 탓을 할 수밖에 없었다.

윤정씨와 상진씨는 고민 끝에 지난해 말 친구들과 함께 온라인 포털사이트에 '구직자 인권법'을 제정하자는 청원을 냈다. 기업의 불합리한 채용관행을 바꾸고 구직자들의 권리를 보호하자는 취지다. 예컨대 취업한 이후 하게 될 정확한 직무정보와 임금 수준을 공개하고 인신공격성 면접은 거절할 권리를 부여하자는 것이다. 공감한다는 반응이 많았지만 "기업은 자기 기준에 맞춰 사람을 뽑을 자유가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서 청원자는 취업을 했느냐"고 묻는 댓글도 있었다. 취업을 못했으니 이런 글이나 올리는 것 아니냐는 조롱 섞인 시각이 깔려 있다. 윤정씨는 "취업하려면 기업을 이해해야 하고, 취업에 실패하면 기업 기준에 못 맞춘 '내 탓'이라고 치부하는 자기계발서 같은 논리"라고 비판했다.

일자리 못 늘려도 취준생 권리는 보장해야

당장 일자리가 없는데 취업이 절실한 청년들더러 왜곡된 노동시장 구조를 거부하라고 할 수 있을까. 상진씨와 윤정씨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했다. 청년들이 내 탓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일자리를 만들어 주거나, 적어도 부당함을 제기할 수 있는 분위기부터 만들어 줘야 한다는 지적이다.

실제 청년들은 기업 횡포를 고발·처벌할 수 있는 '구직자 고충처리 위원회' 같은 기구나 관련 법·제도를 원한다. 개인이 나서기 어렵다면 힘의 균형을 맞출 수 있도록 사회적인 차원에서 대책을 만들자는 제안이다. 청년실업 문제를 개인 탓으로 규정하는 사회인식을 바꾸는 캠페인도 제안했다.

상진씨는 "지금 사회에서는 내가 백수라는 걸 밝히는 게 자존심 상하고 상처가 되는 일인데, 이게 또 취업준비생들이 목소리를 못 내는 이유가 된다"며 "구직자 인권법 같은 게 루저(패배자)의 하소연이 아니라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신경민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은 지난달 구직자 인권법과 흡사한 내용의 채용절차의 공정화에 관한 법률(채용절차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윤정씨는 올해도 언론사에 지원한다. 2년간 이어진 취업준비에 심신이 지치지만 꿈을 놓지 않을 생각이다. 다만 부모님에게 생활비를 의존하는 게 죄송스러워 주택청약통장을 해약할까 고민 중이다. 윤정씨는 "대학 때 모아 놓은 돈을 취업준비에 다 쓰게 됐다"며 씁쓸해했다. 그러면서도 “당장 일자리가 늘어나지는 않더라도 청년이 취업준비 과정에서 상처받고 자책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