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10월 독일로 유학을 떠났던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이 학업을 마치고 1년 만에 귀국했다. 이주호 단장은 국제노동기구(ILO)와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ES)·독일노총(DGB)의 후원으로 독일 카셀대학(Kassel)·베를린 경제법학대학(HWR Berlin)에서 '노동정책과 세계화'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박근혜 정부는 독일 경제모델에 깊은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노동시장 개혁의 바이블로 보는 경향도 나타난다. 과연 그럴까. <매일노동뉴스>가 이주호 단장의 독일 유학기를 연재한다. 이 단장은 연재를 관통하는 제목을 '노동존중 복지국가와 노동운동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라고 썼다. 매주 목요일자에 11회에 걸쳐 싣는다.<편집자>

 

▲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을 소개하는 각종 팸플릿.
▲ 베를린에 있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 전경.
▲ 독일노총 1층 로비에 있는 한스뵈클러 재단 창립자이자 독일노총 초대 위원장인 한스뵈클러 동상 앞에서 브라질 금융노조에서 온 가브리엘과 함께.
▲ 지난해 5월 베를린에서 열린 국제노총 총회장에 설치된 에버트 재단·한스뵈클러 재단 부스 모습.


 

이주호
보건의료노조 전략기획단장

국제노동대학(GLU)을 후원하는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과 한스뵈클러 재단은 독일에서 노동 관련 행사가 열리면 안내부스를 설치한다. 각종 토론회에서 단골 발제자·토론자로 나선다. 한국에서도 이들 재단의 장학금으로 공부한 노조간부와 교수들이 열정적인 활동을 벌이고 있다. 나는 독일에서 두 재단의 역사와 역할에 대해 알게 되면서 한국 정당정치의 발전과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 시급하게 이런 재단을 설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은 16세기 프로이센 왕국 황제와 귀족들을 위한 사냥터였던, 지금은 독일 베를린의 센트럴파크라고 불리는 티어가르텐 근처 히로시마 거리에 자리 잡고 있다.

나는 보건의료노조 방문단에 참여하거나 최근 학술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재단을 몇 차례 방문한 적이 있다. 재단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채광이 잘되는 2개의 큰 건물을 가지고 있다. 원래 옛 서독의 수도인 본에 본부가 있었지만 베를린이 주요한 정치적 공간이 되면서 이쪽에도 본부를 만들었다고 한다.

1960년대 말 설치된 한국사무소는 보건의료노조와 정당·시민사회·연구자들과 네트워크를 통해 파트너십을 형성하며 통일·복지국가·미래 경제 등과 관련된 연구사업과 장학사업, 세미나·논문발간 사업을 벌이고 있다. 보건의료노조는 그동안 에버트 재단 한국사무소와 한국 의료 대안모색, 산별노조 연구, 베르디노조와 한독 정기 노조교류 프로그램 등을 진행하고 있다.

에버트 재단은 독일 기민당(CDU)의 콘라드 아데나워 재단(Konrad-Adenauer-Stiftung; KAS)과 쌍벽을 이루는 양대 재단으로서 평화·민주주의·사회정의를 가치로 내걸고 1925년 창립됐다. 33년 나치 정권에 의해 활동이 금지됐다가 47년 재설립됐다. 독일총연맹(DGB)·사민당(SPD)과 긴밀한 연관을 맺고 있는 독립적인 비영리 공익재단이다. 독일에는 이념적으로 각 당에 연계돼 있는 정치재단이 많은데, 모든 재정을 연방 세금으로 충당하기 때문에 당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구체적 현황을 살펴보면 2012년 현재 상근직원 617명으로 그중 102명이 해외에 주재하면서 아·태 지역에만 17개 지역사무소를 운영하고 있다. 1년 총예산은 1억3천900만유로(약 2천억원)이다. 전 세계 2천650명의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독일에서만 3천여건의 교육·세미나와 토론회, 전문가포럼에 22만명이 참가했다. 웹사이트에는 매년 3천만명 이상이 방문한다. 본에 있는 에버트 재단은 총 97만권의 책을 소장한 유럽에서 가장 큰 기록보관소를 갖고 있다. 노조 관련 자료도 많이 보유하고 있다. 학기 중 에버트 재단에서 직접 방문해 디지털도서관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지기도 했다. 에버트 재단 도서관은 노동역사연구 국제협회(IALHI), 민중 유럽의 문화유산(HOPE), 국제 노조연구네트워크(GURN) 등과 긴밀하게 협력하고 있다.

독일노총 산하 비영리 공익재단인 한스뵈클러 재단은 경제사회연구소(WSI)와 거시경제정책연구소(IMK)라는 두 개의 전문연구기관을 가지고 있다. 경제사회연구소는 노동 관련 분야에서, 거시경제정책연구소는 케인스주의 경제학파 입장에서 독일의 대표적인 연구기관으로 인정받고 있다.

한스뵈클러 재단은 77년 독일노총 공동결정재단과 한스뵈클러 협회가 통합해 설립됐다. 경제사회연구소는 46년 설립돼 2016년 창립 70주년을 앞두고 있다. 재단은 독일 서부지역 뒤셀도르프에 위치해 있는데 독일노총과 파트너십을 가지고 공동결정제도 대응, 각종 연구 조사사업, 장학사업 등 특별한 프로젝트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독일노총과 긴밀하지만 공식적으로는 독립적인 조직이다. 재단 명칭인 한스뵈클러는 독일노총(DGB) 초대 위원장인 한스 뵈클러(1875~1951)로부터 유래했다. 그는 독일 노동운동사에서 상징적인 지도자로 존경받고 있다. 베를린 시내에 있는 독일노총 본부를 방문하면 1층 로비에서 그의 흉상을 볼 수 있다.

재단 1년 예산은 2013년 현재 6천700만유로(약 950억원)다. 재원은 노조대표자 중심의 기부금과 연방정부의 지원에 의해 조달되며 학생들에게 2천만유로(280억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노조간부들과 학생들은 누구든 재단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으며 대략 2천명의 장학생들을 국내외에서 선발해 장학금을 지급한다.

재단 이사회는 40여명의 이사로 구성돼 있다. 이 중 11명이 독일노총을 대표하는 노동이사들이다. 2개국에서 200여명이 근무하고 있으며 500여명의 연구자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매년 100건 이상의 행사·토론회 등을 개최하면서 280여권의 출판물을 발행한다. 재단 의장은 관례적으로 독일노총 위원장이 맡는다. 현재 의장은 라이너 호프만 위원장이다. 재단은 크게 장학국·연구지원국, 그리고 공동결정지원국·홍보국 등 집행부서와 연구기구인 경제사회연구소와 거시경제정책연구소로 구성돼 있다. 경제사회연구소는 독자적으로 다양한 노동 데이터베이스를 구축·관리하는데 특히 노조 단체협약을 분석한 자료집을 매년 발간하고 있다.

카셀대학 국제양질의일자리개발센터(ICDD)와 정치적 노동재단은 동전의 양면이다. 재단의 든든한 후원이 있기 때문에 글로벌 노조간부를 양성하는 카셀대학 같은 국제대학에서 싱크탱크를 운영할 수 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제대로 된 정치재단이나 노동재단 하나 없는 상황에서 정당 연구소와 노조 정책연구원은 부족한 예산과 불안정성으로 인해 대부분 단기적 선거와 당면 투쟁에 매몰돼 있다. 그로 인해 정책정당은 요원하고, 노조도 중장기적인 전략수립과 긴 호흡의 거시적 운동 모색은 꿈도 꾸지 못하고 있다. 진정으로 한국 사회가 정책 중심 정당정치 강화와 노동의 올바른 사회적 역할을 바란다면 이제 독일식 재단 설립에 대해 노동계 내부는 물론 학계·교육계·시민사회·국회 등이 나서 사회적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독일식 노동재단 설립을 통해 장학사업과 노동교육사업, 자료 아카이브 사업, 국제연대사업 등을 지원한다면 사회적으로나 국제적으로 노동조합의 순기능이 강화되고, 노동 연구의 저변도 대폭 넓어질 것이다. 개인적으로 노조 내부에서 늘 논란이 되고 있는 노조 사업비에 대한 국고지원 찬반 논란을 넘어 노조 외곽에 존재하는 이런 공익적 노동재단 설립 논의가 훨씬 실익이 있다고 판단된다. 노동을 주제로 연구하는 전문가가 줄어들고, 정책력 있는 노조간부가 부족하다고 한탄하거나 몇 개 안 되는 노동대학원에서 노조간부 입학률이 낮아져서 ‘사용자 대학원’이 됐다는 자조만 하지 말고 말이다. 노동재단 설립으로부터 대안을 찾아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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