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9월3일은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가 영면한 지 3주기가 되는 날이다. 1970년 11월13일 서울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며 분신한 전태일 열사는 어머니에게 “내가 못다 이룬 일을 어머니가 대신 이뤄 주세요”라는 마지막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이소선 여사는 2011년 9월3일 목숨을 다할 때까지 아들의 유언을 지키는 데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매일노동뉴스는 이소선 여사 3주기를 맞아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을 연재한다. 저자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는 1990년 이소선 여사 회갑 즈음에 구술을 받아 평전을 집필했다. 당시 1979년의 삶까지 담았는데, 이번에 그 이후 삶을 보강할 예정이다. 평전은 오마이뉴스와 동시에 연재된다.<편집자>



양승조는 1976년 9월24일 구치소로 이송됐다. 그 뒤에도 조합원들은 끈질기게 면회를 다녔다. 11월부터는 재판이 시작됐다. 조합원들은 재판정에서도 끈질기게 싸웠다. 날씨는 갈수록 추워지는데 이소선은 감옥 안에서 추위에 떨고 있을 양승조 생각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런데 재판을 할 때면 으레 형사들이 방청석에 떡 버티고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형사들과 자리 때문에 참 많이 싸웠다. 풍천화섬의 회사측 증인들이 나와 구속자들한테 불리한 증언을 허위로 할 때는 정말 그들이 미웠다. 재판이 있을 때마다 조합원들은 방청을 방해하는 경찰과 싸우다 결국 경찰차에 실려 노동교실까지 오게 됐다.

그해 11월13일 태일이 추도식 날은 유난히 추웠다. 그 추운 날에도 많은 조합원들이 추도식에 참석했다.

“태일이를 살립시다”

낮에는 조합간부를 비롯해 조합원 50여명이 모란공원에 가서 추도식을 하고 밤에는 일을 마친 조합원들이 노동교실에서 추모식을 거행했다. 지난해에는 노동시간단축 투쟁을 비롯해 몇 가지 근로조건이 획기적으로 개선됐다. 그 투쟁으로 조합원이 눈부시게 증가했기 때문에 이날 추모행사에 참가한 조합원 숫자는 600여명이나 됐다. 추모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노동교실의 3층과 4층이 복도까지 빽빽이 들어차 발 디딜 틈이 없었다. 할 수 없이 2층에 있는 '청계시장상가 근로자복지의원'까지 빌려 행사를 치를 정도였다. 이날 조합원들은 추모행사를 마치고 나서 구속자 석방과 근로조건 개선을 요구하며 스크럼을 짜고 거리시위를 하려 했지만 경찰의 제지로 노동교실 밖으로는 진출하지 못했다.

이날 이소선은 청계피복노조 조합원들뿐만 아니라 사회 모든 인사들한테 ‘태일이를 살려 주십시오’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늘 11월13일은 태일이가 근로자의 권익쟁취와 근로조건의 개선 그리고 모든 억눌린 사람의 인간다운 생활을 부르짖으며, 스스로 제 몸을 불태운 지 만 6년이 되는 날입니다.

평화시장 근로자 여러분, 전국의 근로자 및 노동운동가 여러분!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며 근로자의 단결된 투쟁을 호소한 이날은 바로 우리 모두의 살 길을 정당하게 인식하고 행동으로 우리의 살 길을, 빼앗긴 권리를 쟁취해야 할 날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6년의 세월이 지나도록 근로자의 보다 나은 생활이나 근로조건의 개선은커녕, 우리의 고통은 더욱더 심해지고 전태일의 이름은 이 땅에서 영원히 사라지기를 강요당하고 있을 뿐입니다.

정의와 진리가 배신당하고 폭력과 기만이 활개를 치려 드는 암담한 현실은 태일이를 더욱 생각나게 하고 태일이의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결의를 더욱 다지게 합니다. 더욱이 태일이의 뜻을 이어받아 근로조건의 개선과 권익옹호를 위해 끈질기게 노력하다가 감옥에 들어간 양승조군을 생각하면 나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프며 거기에다 우리 시장 근로자의 죽음을 각오한 철야단식 농성으로 양 부장의 석방을 보장받고도 그것이 한낱 기만에 불과했구나 생각할 때 더욱 분해집니다.

또한 우리 근로자를 위해 힘쓰다가 구속된 분들이 이 추위에 고생하고 있는 것을 생각하면 죄스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근로자 여러분! 그러나 우리는 실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끈질기게 투쟁해 왔고 또 계속적으로 승리해 왔습니다. 우리가 뭉쳐 싸울 때 어떠한 어려움도 이겨 낼 수 있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확신했습니다.

나는 근로자 여러분의 확고한 권리의식과 강렬한 투쟁정신에서 태일이의 부활을 보고 싶습니다. 태일이를 살립시다. 태일이를 살려주십시오!"

양승조는 결국 해를 넘겨 77년 2월8일 20만원의 보석금으로 구속된 지 5개월 가까이 돼서 석방됐다. 양승조가 나오는 날 노조에서는 석방을 기념하는 페넌트를 만들어 조합원들한테 나눠 줬는데, 페넌트의 색깔이 빨간색이라는 이유로 중부경찰서 정보과에서 빨갱이라고 트집을 잡기도 했다.

저항의 봄 앞두고 수배자 쫓는 중앙정보부

당시 정국은 반유신 투쟁과 박정희 정권 퇴진투쟁으로 말미암아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76년 ‘3·1 구국선언’을 기점으로 각 대학에서도 구국선언을 하면서 학생들이 유신철폐와 박정희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데모를 벌였다. 77년 3·1절을 기해 학생·재야인사·노동자들이 대대적인 반정부 투쟁을 벌일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두에서도 유신을 비난하고 박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유인물이 뿌려졌다. 각 대학 개학을 앞두고 정보기관에서는 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을 잡아들이려고 혈안이 돼 있었다. 중앙정보부 요원들은 유인물을 작성한 사람들을 찾기 위해 수배자들을 뒤쫓았다.

이 같은 정세에서 3·1절을 며칠 앞둔 어느 날 저녁 이소선은 날벼락 같은 소식을 들었다. 장기표가 종암동의 어느 다방에서 잡혔다는 것이었다. 장기표는 그동안 이소선과 지속적으로 은밀하게 만나고 있었다. 이소선뿐만 아니라 청계피복 조합원들 몇 명도 남 몰래 만났다. 그중에서도 전태삼·민종덕, 그리고 청계피복 조합원은 아니지만 노동운동을 헌신적으로 하는 박문담 등이 장기표를 지속적으로 만났다. 이소선은 이들을 개별적으로 따로따로 만나게 해 줬는데, 어떤 때는 함께 만나기도 했었는가 보다. 이날도 장기표는 이들 셋을 만날 예정이었다. 그런데 상당히 오래전부터 공작을 벌여 온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약속장소였던 다방에서 장기표를 체포한 것이다.

장기표가 잡혔다는 소식은 약속시간보다 늦게 다방에 도착한 전태삼이 알렸다. 전태삼은 다방에 들어가려다 정보요원들이 장기표·민종덕·박문담을 다방에서 끌어내 차에다 싣는 것을 보고 곧바로 도망 나와서 여기저기에 전화를 했다.

장기표는 그동안 평화시장 제품공장에서 1년여를 일했다. 그러다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함께 도피생활을 하던 조영래의 도움으로 결혼(물론 비밀결혼)을 해서 월곡동 시영아파트에서 살고 있던 중이었다.

그는 그해 봄 반정부 투쟁을 앞두고 분주하게 일을 꾸미고 다니다 덜컥 잡혀 버렸다. 이소선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았다. 이제 잡혀 들어가면 얼마나 많은 형량을 받을 것인가! 온갖 걱정이 들었다. 물론 민청학련 사건 당시에 잡혔으면 틀림없이 사형을 받았을 것이다. 그때를 피했으니 지금은 극형이나 중형은 내릴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마 천만다행이 아닌가. 그래도 그렇지 단 몇 년이라도 감옥살이를 한다면 감옥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고생스러울 것이며, 또 밖에서 계획했던 일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참으로 가슴 아프고 안타까웠다. 그럴수록 이소선은 박정희 정권에 대한 미움이 솟구쳐 올랐다.


민종덕 전 전태일기념사업회 상임이사
<계속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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