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세길 역사연구가

지난해 여름 언제쯤인가 한 지역에서 강의를 했다. 뒤풀이 자리에서 진보정당 당직자로 일하는 여성 한 분과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분은 이야기를 하다가 끝내 눈물을 흘리고 말았다.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다는 것이었다. 진보정당의 전망은 전혀 보이지 않고 그동안 함께했던 사람들의 관계가 너무 험악해져 있어 돌아다니기조차 거북스럽다는 것이었다.

필자는 그 여성의 눈물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그날의 느낌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어찌 하다 이 지경이 됐을까. 도대체 누가 이 사태를 책임져야 한단 말인가. 고민이 잠시도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필자가 도달한 결론은 매우 단순 명료했다. 책임은 그동안 진보정당운동을 이끌고 온 모든 사람들의 몫이었다. 그럼 어떻게 책임져야 하는가. 적어도 1선에서 지도적 역할을 했던 사람들은 모두 2선으로 물러나야 한다. 그리곤 때 묻지 않은 새로운 주체 건설에 복무해야 한다.

필자는 비슷한 연배를 만나면 입버릇처럼 이야기를 했다. 우리 모두는 죄인이다. 이제부터는 빚을 갚는 마음으로 진보운동에 임해야 한다. 일개 야인에 불과한 신세지만 필자는 더 이상 리더 위치에 서지도 않을 것이고, 진보운동을 기반으로 하는 그 어떤 공직 진출도 시도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책임지고 2선으로 물러났겠습니다”라고 사죄하고 물러나겠다는 사람을 별로 발견하지 못했다. 서로 남의 탓으로 돌리는 험악한 목소리만이 여기저기 난무할 뿐이다. 몹시 혼란스러웠다. 도대체 기성 정당보다 우월한 점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러던 차에 안철수의 신당과 민주당이 합당을 단행했다. 그 결과 양당 독점 체제는 더욱 강화됐다. 정국은 새정치연합과 새누리당의 양자 대결구도로 급격히 재편됐다. 진보정당의 입지는 더욱 좁아진 듯 보였다. 적어도 단기적으로 볼 때 이는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었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다시 선거철이 됐다. 명색이 정당이다 보니 진보진영 정당들도 후보를 내서 열심히 뛰고 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정면 돌파해야 하는 입장에서 보면 당연하고도 불가피한 일일 것이다. 그리고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일궈 내는 것이 그나마 내일을 기약할 수 있는 길일 것이다.

하지만 서글픈 소식이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오랫동안 진보정당운동의 메카로 역할을 해 온 울산으로 가 보자. 현재 울산에는 진보정당 간판으로 나온 시장 후보가 세 명이나 된다. 각 진보정당의 입장에서는 울산 지역의 중요성을 감안할 때 시장 후보를 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칫 하면 존재감을 상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를 지켜보는 진보 성향 유권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어떤 사람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었다고 말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안타깝다 못해 화가 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창피해서 더 이상 진보를 입에 올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어느 모로 보나 최악의 상황이다. 지난 1기 진보정당운동은 완전히 실패했다는 일각의 평가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고 과연 여기서 포기하고 주저앉을 것인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모든 것을 뒤집어 생각함으로써 위기를 기회로 바꾸는 역발상의 지혜다.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한 전투로 알려진 제2차 세계대전 중 스탈린그라드전투 때의 이야기다. 독일의 히틀러 입장에서 볼 때 볼가강 하구에 위치해 있는 소련의 도시 스탈린그라드는 코카서스 유전지대로의 안전한 진출을 보장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스탈린의 이름이 붙은 도시를 점령함에 따른 상당한 심리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총력을 기울였다. 마찬가지 이유로 소련 역시 스탈린그라드 방어를 위해 사력을 다했다. 인간의 상상을 불허하는 참혹한 시가전 끝에 독일군이 소련군을 제압하면서 시가지의 90퍼센트를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독일군이 승리를 눈앞에 두고 있었던 바로 그 순간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키는 역발상의 지혜가 전투의 운명을 갈랐다. 시 외곽으로 밀린 소련군이 거꾸로 시내로 진주한 독일군을 포위한 뒤 보급로를 차단한 것이다. 독일군은 결사적으로 저항했으나 보급이 끊긴 상태에서 혹한의 겨울이 닥치자 결국 항복하고 말았다. 죽을 고생해서 점령한 지역이 죽음의 함정으로 돌변한 것이다. 이후 전투가 진행된 지역을 발굴한 결과 독일군 14만7천200명, 소련군 4만6천700명의 사체가 발견됐다.

진보정당운동의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킬 ‘출구전략’은 분명 존재한다. 앞으로 우리는 몇 차례에 걸쳐 이를 살펴볼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엄격한 전제가 있다. 기존에 갖고 있던 모든 것을 내려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길은 결코 보이지 않을 것이다.

역사연구가 (newroad20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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