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훈
철도노조 지도위원
(전 민주노총 위원장)

우리나라 보수언론들은 지난 2일부터 6박8일 일정으로 유럽을 순방한 박근혜 대통령이 첫 순방지인 프랑스에서 유창한 불어연설로 대한민국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고 일제히 보도했습니다. 특히 4일 프랑스 기업인들 모임인 메데프본부에서 행한 박 대통령의 연설에 참석자들은 기립박수와 함께 격찬(surtout felicite)을 보냈다고 전했습니다. 대통령의 한복 패션이나 외국어 실력이 어떤지와 같은 지극히 지엽말단적인 내용을 주요 기사로 다루던 한국언론 어디에도 왜 대통령이 프랑스 기업인으로부터 '격찬'을 받았는지에 대한 분석기사는 없었습니다.

오히려 박 대통령 연설내용을 상세히 보도한 것은 프랑스 제1의 일간지 르몽드였습니다. 르몽드는 “한국이 공공시장을 외국기업들에 개방할 예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박 대통령은 프랑스 기업들에게 “공공부문 시장개방을 약속하면서 양국 간 교류에 장애가 되는 일련의 장벽들을 제거하기 위한 대통령 시행령이 조만간 개정될 것”이라고 명확히 밝혔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한국 철도시장 개방과 관련한 프랑스 기업인의 요청에 답변 형식으로 이뤄진 박 대통령의 발언 내용은 "도시철도시장 개방과 관련해서 세계무역기구(WTO) 정부조달협정의 국내 비준을 추진하고 있고, 이 비준이 통과되면 연내 WTO에 비준 기탁서를 제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한다. 그렇게 되면 도시철도 분야의 진입 장벽도 개선될 수 있다고 본다"는 것이었습니다.

외국자본에 대한 철도시장 개방이라는 중대한 통상조약의 변경을 올해를 불과 두 달도 남기지 않는 현 시점에서 국회비준과 기탁서 제출까지 약속한 박 대통령의 발언이 과연 정상적인가에 대한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기업인들 입장에서는 기립이 아니라 공중부양이라도 할 정도의 파격적인 내용이었던 것이죠. 정부는 다음날인 5일 정홍원 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무회의에서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을 의결했습니다. 그동안 정부조달물품에 대한 다자간 투자개방 예외 분야였던 철도시장 개방을 허용하는 내용으로 협정을 개정한 것입니다.

통상조약의 비준과 변경은 헌법과 통상절차법에 따라 응당 국회 보고와 동의절차를 구해야 함에도 국회 보고는 물론이고 어떤 언론에도 알리지 않았습니다. 오직 이날 국무회의에서 의결한 통합진보당 해산심판 청구에 관한 건만 대대적으로 보도됐습니다. 박 대통령이 통합진보당에 대해 헌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정당해산을 청구하는 전무후무한 일을 의결한 그 회의에서 그 자신이 헌법과 관련 법률을 위반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나아가 이정현 청와대 홍보수석은 11일 언론 브리핑에서 "WTO 정부조달협정 개정안에 대한 심사 결과 국회 동의가 불필요하고, 대통령 재가를 거쳐 비준하면 된다"며 "국무회의에 상정돼 있기 때문에 조만간 국무회의 심의가 끝나면 대통령 재가를 거쳐 WTO 사무국에 제출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미 5일 국무회의를 통과했음에도 대놓고 국민을 속인 것입니다. 13일 한겨레신문은 1면 머리기사로 ‘정부, 외국자본에 철도시장 개방 기습의결’ 소식을 전했습니다. 4일 대통령의 유창한 불어실력만 알렸던 청와대는 국민생활에 심각한 영향을 미치는 통상조약 변경을 철저히 비밀리에 추진했습니다. 그 절차도 명백한 헌법위반인 데다, 사실상 철도주권 포기라는 비난을 자초하고 있습니다.

이명박 정권이 집권 초기 촛불항쟁이라는 거대한 국민저항에 직면했던 이유는 다름 아닌 ‘국민을 속이고 밀실에서 퍼다 준 검역주권’ 때문이었습니다. 부시 대통령의 텍사스 목장에 초대받고 미국 기업인들로부터 극찬을 받은 이명박 대통령이 정작 국내에서는 어떠한 공론화도 없이 광우병 위험이 있는 쇠고기에 대한 전면적인 수입개방을 약속한 것이 촛불항쟁의 시발이었습니다.

이달 27일 위헌적인 철도시장 개방 밀실추진에 반대하는 922개 시민·사회단체들이 원탁회의를 구성하고 공동대응을 결의했습니다. 박근혜 정권 출범 이후 가장 광범위한 시민과 종교계, 정당과 전문가들이 자리를 함께한 것입니다. 이 자리에서 대부분의 참석자들은 박 대통령의 일방통행과 공약파기가 임계점을 넘고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한편 조은동 청와대 경제수석은 이와 관련해 "WTO 협정 개정을 철도 민영화 전 단계로 본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 공기업이 자신 없어 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 있어 걱정"이라고 말했습니다. 철도시장 개방이 진정으로 철도 민영화와 무관하다면 왜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면서 밀실에서 추진했을까요. 철도노동자들은 자신이 없는 것은 바로 당신들 아니냐고 묻고 있습니다.

철도노조 지도위원(전 민주노총 위원장) (krw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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