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호
울산저널 편집국장

몇 년 전 여름 태국 방콕엘 갔다. 섭씨 40도가 넘는 더위에 호텔방에 꼼짝없이 박혀 있어야 했다. 새벽이나 저녁 무렵도 덥긴 마찬가지였지만 밖으로 나와 이 불교의 나라 수도를 어슬렁거렸다. 땀이 비 오듯 했다. 저녁 무렵 인공호수가 있는 넓은 공원에 앉아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스피커에서 무슨 노래가 나오더니 산책하던 사람들이 모두 부동자세로 기립했다.

우리 어릴 적의 국기 하강식 같아 보였다. 돌아와 심심해서 저녁 내내 텔레비전을 틀어 놓고 알아듣지도 못하는 태국방송을 봤다. 뉴스엔 군복 입은 사람들이 많이 나왔다. 그 색깔도 우리나라 어버이연합회 같아 많이 거슬렸다.

그런 태국이 최근 시위로 한 달 넘게 몸살을 앓고 있다. 급기야 반정부 시위대는 지난 24일부터 수도 방콕시내 각종 정부청사를 점거하기 시작했다. 지금은 시위대가 재무부와 내무부 등 5개 부처를 장악했고 대법원과 국토부, 특수수사국 등 정부청사 단지도 포위했다. 시위는 태국 전국으로 번져 10개주에서 총리 사퇴를 요구하고 있다.

시위대가 여성 총리의 사진에 가위표를 칠한 채 들고 다니는 사진도 등장했다.(중앙일보 28일자 20면)

보통의 동남아 나라들은 불과 몇 년 전까지, 혹은 지금도 오랜 권위적인 독재정권 아래에 있기 때문에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면 경찰력과 군부를 동원해 간단하게 제압한다. 그런데 사태가 이 지경이 되도록 태국 정부는 거의 수수방관하고 있다. 정부 기능이 사실상 마비된 상황에서도 태국 정부는 인내만 하고 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장면이다. 태국 정부는 80년대 한국처럼 그 흔한 최루탄도 쏘지 않고 있다.

국내 언론 중에서도 태국의 이상한 현 상황을 쉽게 설명해 주지 않는다. 그냥 시위가 벌어졌고, 몇 개 시설이 점거됐다는 식으로 경마보도만 하고 있다.

태국이란 나라는 우리 관광객도 많이 찾고, 우리와 교류도 꽤 오래한 나라인데 외신을 읽어 내는 눈이 이렇게도 어두워서야.

의석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현 집권정당은 예부터 포퓰리즘 정책으로 노동자·농민 등 서민층의 압도적 지지를 받아 왔다. 오히려 지금 방콕 거리에서 총리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대가 더 보수적인 사람들이다. 반정부 시위대를 이끄는 사람은 부총리까지 지낸 사람으로 제1 야당인 민주당이 그 배후다. 태국 민주당의 지지기반은 보수 성향 부유층과 고위 정부관료, 군 관료에다가 심지어 왕정 복고론자까지 포함돼 있다. 이들이 오늘날 태국을 망친 장본인들이다. 그렇다고 현 집권세력의 포퓰리즘 정책이 옳은 것도 아니다. 현 정권은 부패 혐의를 받고 외국으로 도망간 직전 총리를 현 총리와 친인척이라는 이유로 사면하려 한 점만 생각해도 국민을 위한 정부는 아니다.

민주당은 현 정부가 조기총선을 실시해도 지지기반이 약해 승산이 없다. 그래서 계속 주요 시설을 점거하면서 현 정부가 무력진압을 하도록 해 무정부 상태를 만들고 싶은 거다. 바로 이 때문에 현 정부도 쉽게 무력진압을 못하는 거다. 무력진압은 곧 민주당이 파 놓은 덫이기 때문이다.

참 혼란스러운 나라다. 지금 태국에서 충돌하는 두 세력 모두 노동자·농민과 아무 상관없는 사람들이다. 그런데도 두 정당은 정부청사 점거라는 극한 상황 속에 노동자·농민을 동원해 줄 세우고 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민주당 정권 10년이나 이명박·박근혜 정권 6년이나 부자는 살리고 서민은 죽이는 정책에선 다를 바 없다.

울산저널 편집국장 (leejh6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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