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희망버스 참가자와 동료들이 최병승ㆍ천의봉씨가 내려오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두 명의 노동자가 하늘로 올라도 눈도 깜짝하지 않는 정몽구 회장을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도 들더군요. 10년 동안 같은 말을 외쳐도 변하지 않는 세상이 지긋지긋하기도 했고요. 그럴 때마다 저를 걱정해주고 위로해 주는 동지를 때문에 이 자리까지 왔습니다. 길어 봐야 또 다른 10년입니다. 포기하지 맙시다.”

8일 오후 1시20분께. 현대차 울산공장 명촌 중문 송전탑 아래 모인 수백명의 인파가 약속이라도 한 듯이 좌우로 갈라졌다. 꼬리 끝에 사람이 옮겨 탈 수 있는 철제 박스를 단 소형 크레인 하나가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송전탑 23미터 지점에 마련된 농성장에서 붉은 현수막 너머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천의봉·최병승씨가 서로를 부둥켜안았다. 천씨가 흐느끼자 최씨가 등을 다독였다.

현대차를 상대로 불법파견 철폐투쟁을 벌여왔던 천씨와 최씨가 8일 오후 296일간의 고공농성을 마치고 땅을 밟았다.

처음으로 그들을 맞이한 것은 40도에 달하는 기록적인 폭염으로 인한 땅바닥의 열기였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뜨거운 것은 “수고했다”, “고생했다”라며 맞아 준 사람들의 목소리였다.

천씨와 최씨는 “고난의 10년을 보냈지만 비정규직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그 시간을 굳건히 견뎌왔듯 또 다른 투쟁을 이어 갈 것”이라고 답했다.
 

▲ 최병승ㆍ천의봉씨가 철탑 앞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폭염보다 뜨거웠던 건 체온

전날 천씨가 사무장으로 일하고 있는 금속노조 현대차울산비정규직지회(지회장 박현제)는 이날 오후 1시께 두 농성자들이 고공농성을 해제하고 땅을 밟을 것 예고했다.

하지만 이보다 이른 오전 11시께부터 지회 간부·조합원들을 비롯해 전국에서 모인 취재진과 노동·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송전탑 아래로 모여들었다.

20년 경력의 사진작가 장영식(52)씨는 전날 밤 언론을 통해 고공농성 중단 예고를 접하고 한걸음에 서울서 울산으로 내달려 왔다.

장씨는 “올라간 다음날부터 이들의 투쟁을 카메라에 담아 왔는데 마지막 밤을 함께하고 싶다는 생각에 이 자리에 왔다”며 “누구는 300일 동안 변한 것이 뭐냐고 묻지만 그러한 노동자의 현실을 보여준 것 자체도 투쟁의 의미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초조한 듯 종종걸음을 치며 송전탑 위를 바라보던 최용국(42)씨는 천씨 등에게 계속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최씨는 지회 대의원으로 활동하면서 평소 이들과 가깝게 지내왔다고 했다.

“둘 다 제 동생이지만 지금까지 버텨온 것이 너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같은 처지에서 형으로써 제가 한 게 뭔가 싶어 미안할 따름이고요. 내려오면 둘이서 다른 걱정은 하지 말고 푹 쉬었으면 좋겠어요. 긴 싸움인데 그래야 또 힘을 내지요.”

"두 동지가 자랑스럽다"

정오가 지나자 무리의 규모가 커졌다. 심상정(정의당)·김미희(통합진보당)·장하나(민주당) 의원도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2일 발대식을 연후 전국을 순회 중인 21세기한국대학생연합(한대련) 소속 대학생 80여명도 여기에 합류했다.

송전탑 아래 500여명의 군중이 모이자 우상수 지회 사무차장의 사회로 연대발언이 시작됐다. 주봉희 민주노총 부위원장은 “오늘 두 동지가 땅을 밟은 것을 계기로 비정규직 투쟁을 전체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확산시킬 것”이라며 “전국의 모든 노동자를 깨워 현대차와 전면전을 펼칠 것”이라고 말했다.

최정명 금속노조 부위원장은 “어제 헌법재판소가 불법파견 사업주에 대한 처벌이 합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는데도 정몽구 회장은 여전히 불법파견을 인정하지 않고 몽니를 부리고 있다”며 “오늘 농성 해제를 노동자 모두가 더욱 단결해서 싸우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희망버스기획단은 이날 긴급 성명을 “고공농성은 해제됐지만 희망버스 투쟁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희망버스기획단은 “잔인한 고통의 시간을 견딘 최병승·천의봉 두 동지가 자랑스럽다”며 “현대차 불법파견 문제 해결과 비정규직 정규직 전환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오는 31일 희망버스는 중단 없이 달려갈 것”이라고 말했다.
 

▲ 296일의 농성이었다.


새로운 투쟁의 시작

오후 1시30분께. 천씨와 최씨가 크레인 꼬리 끝 구조물에 올라 전신을 드러냈다. 주봉희 부위원장과 강성신 민주노총 울산본부장이 이들을 부축했다.

둘의 다리는 미세하게 흔들렸지만 목에서는 우렁찬 구호가 튀어 나왔다. “우리는 강하다, 반드시 승리한다” “지도부를 중심으로 파업투쟁 승리하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김소연(43)씨가 울음을 터뜨렸다. 김씨는 사측의 구조조정에 맞서 장기간 투쟁을 벌인 금속노조 기륭전자분회 초대 분회장으로 활동했다.

“장기투쟁을 해본 입장에서 남의 일 같지가 않아 저도 모르게 눈물이 나왔어요. 이렇게 노동자들은 힘들어 하는데 변하지 않는 세상이 야속해서도.”

천의봉씨는 “올라가는데 10일이 걸렸는데 내려오는 데는 1분이 걸렸다”며 바닥에 주저앉아 눈물을 참지 못했다.

최병승씨는 “철탑에 올라와 있는 296일간 삼성전자서비스·이마트 등 불법파견 문제가 확산되고 있는 한국사회를 보며 비참함을 느꼈다”며 “정몽구 회장이 10년 동안 처벌을 받지 않으니 이런 현상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최씨는 하지만 “정권과 자본이 우리 편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제껏 싸워 왔다”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천씨 등은 간단한 소감을 전한 후 울산 중부경찰서로 향하는 차량에 올랐다. “수고했다”, “다시 싸우자”는 목소리와 함께 군데군데서 들려오는 흐느낌이 둘의 뒤를 따랐다.

김상록 지회 정책부장은 "이번 투쟁을 시작하기 전과 후를 비교해 보면 조합원들의 눈빛과 에너지가 달라졌다"며 "이번 투쟁을 밑거름 삼아 중단된 특별교섭을 강화하는 등 새로운 투쟁을 본격화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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