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표하고 출근하려고 새벽 5시30분에 일어나자마자 투표소로 달려갔어요. 꼭두새벽인데도 줄 서서 투표하려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아 놀랐어요."

경기도 안산 반월공단의 동양피스톤에서 생산직으로 일하는 박근형(37·가명)씨는 18대 대통령선거 투표일인 19일에도 평소와 다름없이 오전 8시30분부터 오후 8시30분까지 꼬박 12시간을 일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민주노총과 참여연대 등 노동·시민·사회단체들의 압력에 회사가 생산가동률을 50%로 낮춰 평소보다 출근하는 사람이 절반으로 줄었다는 점이다.

이번 대선 선거운동 기간에는 노동자의 투표권 보장을 위해 선거일을 유급휴일로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그 어느 때보다 높았다. 그러나 법 개정에 이르지는 못한 탓에 정상근무를 하는 사업장이 많았다.

정상영업 백화점, 협력업체 파견노동자 “우리는 언제 투표하나”

이날 오후 서울 중구 소공동 롯데백화점 본점은 평소와 다름없이 손님들로 북적였다. 투표권보장공동행동과 서비스연맹이 대선 투표일에 개점시간 변경을 요청하는 공문을 이달 초 롯데백화점 앞으로 발송했지만, 회사는 기존 영업시간(오전 10시30분~오후 8시30분)을 바꾸지 않았다. 롯데백화점 본점에서 일하는 이은경(29)씨의 이날 출근시간은 평소와 같은 9시30분이었다. 그는 서둘러 투표를 하고 제시간에 출근했다. 이씨는 “출근하고 얘기를 들어보니 투표를 못한 동료들이 많았다”며 “저녁 9시쯤에나 퇴근할 수 있어 출근할 때 투표를 못한 직원들은 투표할 기회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부산 신세계면세점에서 일하는 강경희(38)씨는 이날 새벽 5시30분에 일어났다. 출근 전에 챙길 게 한두 가지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 준비도 해야 하고 4살, 7살 난 아이들 유치원 보낼 준비도 해야 한다. 강씨는 “면세점 직영사원은 오후 5시에 퇴근하도록 해 투표를 할 수 있지만 협력업체 사원들은 평소와 같이 6시에 퇴근하도록 했다”며 “파견사원들도 투표할 수 있게 업무시간 조정을 강제하거나 투표시간을 연장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면세점에서 루이뷔통 같은 명품 가방을 판매하는 부루벨코리아의 김성원 노조위원장은 “좀 일찍 일어나서 투표하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오전 시간에 아이들을 챙기다 보면 짬을 내기가 쉽지 않다”며 “매장 오픈시간을 조금만 늦춰도 편한 마음으로 투표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 위원장은 이어 “회사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면 실효성이 없다”며 “일하는 사람들의 공민권을 실질적으로 보장하려면 법으로 강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동화면세점에서 근무하는 윤혜미(23)씨는 “비정규직 문제가 해결되고 병원비 걱정도 안 할 수 있는 사회를 희망한다”며 “잘못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바로잡을 수 있는 후보가 당선됐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업주 “법적 문제 없다” 배짱

경기도 의정부에서 안산 반월공단 S제약사로 출퇴근하는 심지혜(27·가명)씨는 “투표를 하고 출근하려면 적어도 두 시간이 걸린다”며 “다행히 회사가 평소보다 1시간30분 늦게 출근하라고 조치해서 소중한 한 표를 행사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주야 맞교대로 근무하는 일부 생산부서는 평소와 똑같이 오전 8시30분에 출근해 오후 8시30분까지 일했다. 신씨는 “지난 총선 때는 투표일이 유급휴일로 처리해 줘서 불가피하게 근무를 하면 특근수당을 받았는데, 이번 대선은 그렇지 않았다”며 “조회시간에 관리자에게 항의했지만 '본사 방침이고 법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답변만 돌아왔다”고 토로했다.

한편 민주노총은 이날 성명을 내고 "국민의 투표권 행사 보장을 위해 노동·시민단체가 요구한 선거일 유급휴일 지정과 투표시간 연장을 새누리당이 반대해 무산됐다"며 비판했다. 민주노총은 "노동조합이 없는 많은 사업장이 투표일에도 근무하지만, 노동자가 투표시간 보장을 요구하기도 쉽지 않은 현실"이라며 "투표권을 보장하지 않는 사업주는 꼭 처벌받도록 해 일벌백계의 교훈을 남길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미영·윤자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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