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훈 기자


“은행 문 여는 시간을 앞당기면 퇴근이 빨라질 줄 알았죠.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어요. 출근시간은 당겨졌는데 퇴근시간은 전과 다름이 없더라고요. 집이 먼 사람들은 꼭두새벽부터 집을 나서야 합니다. 은행은 입으로는 퇴근하라면서 손으로는 일을 던져 줍니다. 평생을 이렇게 일에 치여 살아야 하나 두려운 생각이 듭니다.”

금융노조(위원장 김문호)가 올해 임금·단체협상에서 은행 영업시간 변경을 추진하고 있다. 3년 전 노사합의로 변경된 지금의 영업시간(오전 9시~오후 4시)을 과거(오전 9시30분~오후 4시30분)로 되돌리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노조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지금에 와서 애써 바꿔 놓은 것을 ‘없던 일’로 하자는 이유는 뭘까.

애초에 없던 돌발 안건

금융노조와 사용자단체 격인 전국은행연합회가 영업시간 변경을 합의한 것은 지난 2008년 12월이다. 그런데 영업시간 변경은 당초 노사 요구안 어느 쪽에도 포함돼 있지 않았다. 다만 협상이 진행되면서 "자본시장통합법 시행에 맞춰 증권사와 영업시간을 맞추는 것이 낫지 않겠냐"는 의견이 제기됐다. 사회 분위기도 일조한 것으로 보여진다. 김문호 금융노조 위원장은 “당시는 이명박 정권 출범 첫해로 ‘일찍 일어나는 새’를 떠받드는 풍조였다”고 설명했다.

영업시간 조정 문제가 협상 테이블에 오르자 노조 역시 고민에 빠져들었다. 핵심은 노동강도와 초과노동에 관한 문제였다. 노조 관계자는 “노조는 은행 사업장에 만연한 야근문화와 수당 없는 초과노동에 대한 해법을 찾고 있었다”며 “영업시간을 조정하면 퇴근시간이 빨라지고, 시간외수당을 받을 길이 열릴 것으로 봤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노사는 영업시간 변경을 전제로 출퇴근 및 조직문화 개선, 시간외 근무수당 지급에 합의했다. 이듬해 4월부터 은행은 30분 일찍 문을 열었다.

모두가 외면하는 퇴근시간 알림창

그러나 영업시간이 변경됐음에도 세부 합의사항은 대부분 이행되지 않았다. 전제는 지켜지지 않은 채 일하는 시간만 당겨진 것이다. 노사는 영업시간 변경과 관련해 △오전 8시 이전, 오후 7시 이후 회의 자제 △일정시간 이후 CRM(Customer Relationship Management) 전산시스템 및 인터넷 사용제한 △영업시간 이후 공문서 발송 억제 등에 합의했지만 지켜지지 않았다.

정아무개(38)씨는 B은행에서 14년간 창구 텔러로 일했다. 그에 따르면 영업시간 변경 이후 실제 변화가 생긴 것은 빨라진 출근시간과 일정 시간이 되면 컴퓨터 화면에 퇴근시간이 됐다는 알림창이 뜬다는 것뿐이다.

정씨는 “일정 시간이 지나면 인터넷이 끊기고 CRM이 멈추는 척하지만 되살릴 수 있다”며 “일과를 결산하고 영업 할당량이 쌓여 있는데 어떻게 퇴근을 하냐”고 반문했다. 당시 노사는 시간외 근무수당과 관련해서도 “오후 6시부터 오후 7시30분까지 기관별로 운영되고 있는 제도를 감안해 지급한다”, “오후 7시30분 이후 인정된 시간외근무에 대해서는 수당을 지급하거나 또는 보상휴가를 부여한다”는 데 합의했다. 그러나 대다수 은행들은 신청 한도를 제한하거나 실제 초과 근무량과 상관없이 일괄적으로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유주선 노조 부위원장은 “사측이 세부계획을 이행하지 않아 영업시간 변경이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했다”며 “출근시간만 빨라진 것을 원래대로 되돌려 조합원들에게 조금이라도 여유를 주자는 것”이라고 말했다.

영업시간 변경은 '노동강도 바로잡는 수단'

시중은행을 통틀어 기존 영업시간을 고수하고 있는 곳은 SC은행뿐이다. SC은행 노사는 조합원 의견을 수렴하고 고객 실태조사를 거친 끝에 "기존의 영업방식을 고수하는 것이 합리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SC제일은행지부 위원장을 지낸 장장환 금융노조 부위원장은 “오전 9시부터 30분간 은행을 찾은 고객을 집계해 보니 전체의 1%가 채 안 됐다”며 “(영업시간을 바꾸지 않는 것이) 조합원들의 복지나 경영의 관점에서 이익이 더 크다고 봤다”고 말했다.

노조는 영업시간 변경 추진이 은행 접근성을 강화할 방편이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할 예정이다. 김문호 위원장은 “오전 9시보다는 오후 4시에 은행을 찾는 사람이 많기 때문에 국민들의 은행 이용이 원활해질 것”이라며 “국민의 생각이 이와 다르다면 방침을 철회할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노조는 주위의 시선이 '영업시간 변경'이라는 사전적인 뜻에 머무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노조는 “영업시간 변경은 노동강도 완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강조했다.

장시간 노동으로 4명 중 1명 이·퇴직 고려

“기본적으로 영업시작 시간 1시간 전까지는 출근해야 합니다. 매일 회의가 있고, 새상품이라도 나오면 캠페인 준비도 해야 하니까요. 집이 먼 동료들은 이런저런 일정이 겹치면 새벽별을 보고 출근합니다. 같은 인원으로 같은 일을 하려고 하니 시간이 가도 일이 줄지가 않아요. 주위 친구들을 보면 나처럼 힘든 사람이 있나 싶어요.”

과거의 영업시간 변경이 성과를 보지 못한 것은 은행권 노동자의 노동강도가 노조의 예상을 뛰어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권현지 한국노동연구원 박사는 “은행 노동자들의 노동시간 자체가 절대적으로 길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며 “제조업과는 달리 은행권은 노동 투입과 해제 시점이 모호하고 초과근무에 대한 보상이 없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노조와 한국노동연구원이 지난해 10월 말부터 한 달간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은행 노동자 5천141명 중 50.3%가 "최근 1년간 이직·퇴직을 고려하거나 시도한 적이 있다"고 답했다. 주된 이유는 장시간 노동(59%)이었다. 은행 노동자 4명 중 1명은 장시간 노동 등으로 인한 노동강도를 못 이겨 일을 그만두거나 이를 계획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특히 근로시간 증가의 주요 요인으로 성과문화(29.5%)와 인력부족(23%)을 꼽은 노동자들이 많았다. "최근 1년간 업무강도가 더욱 강화됐다"고 답한 은행 노동자가 절반(52.7%)을 넘어섰다.

노광표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은 “은행의 대형화와 기계화, 지주사 체제 개편이 이뤄지면서 업체 간 실적경쟁이 나날이 치열해지고 있다”며 “은행 사업장에 여성 노동자들이 많아 일과 가정을 두루 챙기는 것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노조는 노동강도를 완화하는 현실적인 해법으로 인력충원을 요구하고 있다. 업무 분배보다는 비용 절감 목적이 큰 비정규직 양산을 저지하고,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 노동강도 완화와 사회적 책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는다는 계획이다. 유주선 부위원장은 “해마다 8천~9천명의 은행권 공채가 이뤄지고 있는데, 1인당 평균 초과 근로시간을 감안했을 때 얼마나 추가로 충원해야 하는지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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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자기사] 셔터 내리면 그제야 시작되는 업무

A은행 서울 강남구청지점의 출입문이 닫혔다. 일이 끝났나 싶을 무렵 서아무개(40) 과장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영업시간 중 밀려드는 손님 탓에 처리하지 못했던 일을 마쳐야 하기 때문이다.

서 과장은 입금표와 계좌계설 신청서를 순서대로 정리하고, 대출서류 기입내용을 항목별로 다시 점검했다. 어느새 말로만 정해 놓은 퇴근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동료들과 함께 저녁을 먹고 나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업무를 본다. 관리하는 고객이 어찌나 많은지 늘상 누군가의 생일 아니면 누군가의 예금기일 만료일이다.

요즘에는 고객관리 프로그램(CRM) 성능이 좋아 언제 누구와 어떤 내용으로 몇 분을 통화했는지 알 수 있다. 서 과장은 "한 달 50시간 넘게 초과근무를 해도 수당은 20시간으로 고정돼 있다"며 "수당지급은 구식인데, 노동자를 옭아매는 방식은 최첨단"이라고 씁쓸해했다.

야근이 일상이 된 상황에서도 강남구청지점에서는 몇 년째 비정규직만 뽑고 있다. 그마저도 채용규모가 해마다 줄고 있다.

“인건비를 얼마나 줄였느냐로 지점장을 평가합니다. 그러니 누가 사람을 뽑겠어요. 남아 있는 사람만 죽어 나는 거죠. 영업점 규모나 주위의 유동인구 등 인력배분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필요합니다.”

밤 10시를 훌쩍 넘겨 일을 끝낸 서 과장은 “고액연봉이니 뭐니 해도 무한경쟁에 내몰린 동료들이 안타까울 때가 많다”며 “점심 한 번 여유 있게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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