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칠년에는 땅으로 쉬어 안식하게 할지니 … 그 밭에 파종하거나 포도원을 다스리지 말며 … 땅의 안식년임이니라.”(구약성서 레위기 25장 4~5절 중에서)

보건의료노조에서 16년째 일하고 있는 이주호 전략기획단장. 그는 지난해 11월부터 올해 2월까지 안식년 휴가를 갔다 왔다. 노조 규약에는 10년 근속하면 1개월, 15년 근속하면 3개월의 안식년 휴가를 주게 돼 있다. 이 단장은 연차 등을 붙여 4개월 동안 쉬었다.

안식년 휴가는 ‘7년마다 한 번씩 토지를 쉬게 하라’는 내용의 성경에서 유래했다. 이 단장의 경우 15년을 일한 뒤에야 쉬었기 때문에 '안식년 휴가'라는 말이 무색했지만, 4개월의 짧은 휴가가 준 의미는 컸다.

이 단장은 미국의 전국간호사노조 초청을 받는 형식으로 미국에 체류했다. 오전에는 영어공부를 했고, 오후에는 간호사노조에 출근해 교육·조직 등의 사업을 참관했다. 영어실력도 쌓으면서 미국의 의료개혁 운동과 복수노조 운동을 엿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도움이 된 것은 하루하루가 전쟁터 같았던 한국에서의 노동운동을 잠시나마 떠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노동운동이라는 게 사람운동 아닙니까. 사람과 부딪혀야 합니다. 그런 것에서 잠시 떨어져 여유를 가져 보니, 인간관계에 여유가 생겼어요. 이런 게 재충전인 것 같아요.”


노동단체, 근속휴가·학자금 지원 드물어

우리나라 노동계의 많은 활동가들은 안식년 휴가나 진학 등 재충전 기회를 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을 보장하고 있는 노동단체는 찾아보기 힘들다. 민주노총(16개)과 한국노총(27개) 소속 산별연맹과 총연맹 본부를 통틀어 장기근속자를 대상으로 안식년 제도를 도입한 곳은 단 4곳이다. 민주노총 사무총국과 공공운수노조·사무금융연맹·보건의료노조로 모두 민주노총 소속이다.

민주노총과 사무금융연맹은 6년 근속자에게 6개월의 안식휴가를, 공공운수노조는 7년 근속자에게 6개월의 안식휴가를 준다. 짧은 휴가이지만 직접 경험한 당사자들은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공공운수노조 경기지역본부의 조귀제 조직국장은 안식년 휴가를 두 번 갔다 왔다. 2005년 첫 휴가 때는 6개월간 일본에서 어학연수를 한 뒤 일본 철도노조연맹과 교환근무하는 형식으로 6개월 더 머물렀다. 일본에 있으면서 우리나라 노조들이 그렇게 주장해 왔던 복수노조 제도의 장단점을 가까이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조 국장은 “복수노조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계기가 됐고, 무엇보다 쉬면서 자신을 돌아보고 재충전을 할 수 있어서 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조 국장은 두 번째 휴가를 받은 지난해에는 그가 청춘을 바쳐 일한 옛 공공운수연맹의 연표를 정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할애했다.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어요. 직접 해 보고 싶은 일이기도 했고요. 안식년 휴가를 일로 보냈지만 개인적으로 만족할 만한 시간이었습니다.”

한국노총 소속 자동차노련의 경우 안식년 제도는 없지만 활동가 학자금 지원 제도를 갖추고 있다. 연맹이 운영하는 장학재단의 기금을 통해 학비를 지원한다. 연맹 관계자는 “당사자가 공부를 하겠다는 의지만 있다면 연맹이 전폭적으로 지원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연맹 사무처 간부 4~5명이 대학원이나 방송대학 등을 수료했거나 다니고 있다. 안식년 휴가나 학자금 지원 같은 혜택을 받지 못하는 다른 조직의 활동가들은 이들이 부럽기만 하다.


지친 심신, 추스를 기회도 없어

노동운동 경력 20년의 정문주 한국노총 정책실장. 동료들에게 그는 '문서제조기'로 통한다. 정책담당자인데도 연구보다는 각종 회의와 회의자료·보고서 작성에 매달려야 하는 그의 처지를 빗댄 표현이다.

정 실장 역시 정책활동가로서 수준 높은 내공을 쌓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몇 년전 노동전문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했지만 성에 차지 않는다고 했다. 그에게 6개월의 안식년 휴가가 주어진다면? 대답은 간단명료했다.

“3개월은 원 없이 책만 읽고, 3개월은 여행을 다닐 겁니다.”

원래 안식년 휴가는 연구휴가 또는 연수휴가의 개념으로 사용되는 게 일반적이다. 학습을 통한 전문역량 향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런데 그나마 있는 노동계의 안식년 휴가는 길어야 6개월이다. 학위나 자격증을 따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기간이다.

활동가들은 연구는커녕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를 기회조차 잡기 힘들다. 안식년 휴가를 가는 활동가들 상당수가 치료나 요양, 혹은 체력단련·여행으로 휴가를 보내는 이유다.


전문가들 “장기적 관점에서 안식년 도입해야”

노동운동 활동가들에게 재충전이나 학습의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결과적으로 그 부작용은 고스란히 노동계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우선 대중들에게 쉽게 다가갈 수 있는 정책대안 개발이나 영향력 확대는 포기해야 한다. 참신한 아이디어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모순인 상황이기 때문이다. 지금과 같은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 전망부재 상황이 계속될 경우 정책역량을 갖춘 활동가들의 이탈은 불가피하다. 악순환의 고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소장은 “10여년 전에 비해 노동계 등 이른바 ‘노’자가 들어가는 쪽의 인력풀이 양적·질적으로 사용자측에 비해 뒤지는 게 사실”이라며 “인력을 키워 낼 능력이 한계에 부딪혔고, 실력 있는 인재를 잡을 능력도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은수미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최근 복지정책에 대한 수요가 높았지만 노동계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며 “패러다임이 변하는 과정에서 능력 있는 간부를 육성하지 못하고, 정책대안을 마련하는 데 실패한 결과”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식년 휴가 등 재충전 기회와 학습기회를 보장해야 한다는 지적에 공감했다. 김 소장은 “활동가는 조직의 논리에 빠지기 쉽다”며 “그런 점에서 보면 조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자신과 조직을 돌아볼 수 있는 안식년 제도가 유의미하다”고 강조했다.

은 연구위원은 “대중을 위한 정책수립 차원에서 노동계 지도부가 안식년 제도의 의미를 고민이라도 해 봤는지 의문이 든다”며 “전문적인 능력과 경험을 갖춘 이들을 재배치하고 그들에게 시간과 기회를 줘야 한다”고 말했다.

현재 운영되고 있는 안식년 제도를 좀 더 내실화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휴가를 알차게 보낼 수 있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미정 민주노총 정책국장은 “안식휴가를 가서 반드시 공부만 할 필요는 없다”며 “휴식을 하든지, 체력단련을 하든지 간에 재충전을 한 뒤 다시 노동운동에 헌신할 수 있도록 실효성 있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상자기사] 활동가들이 매너리즘 피하는 방법

과감하게 선택하고, 닥(치고)공(부)사(수)!


노동계가 안식년 제도와 학자금 지원과 같은 지원프로그램을 도입하려면 재정과 인력을 갖춰야 한다. 돈과 사람이 부족한 상황에서 활동가들에게 안식년 휴가를 주거나 학비를 지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돈과 사람이 있더라도 해당 조직 조합원들의 동의절차를 거쳐야 한다.

그렇다면 조직의 지원만 기다려야 할까. 경험 많은 활동가들은 "조직의 지원만을 기다리면서 자기계발이나 재충전의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고 조언한다. 재충전과 새로운 경험을 위한 투자를 과감하게 해야 한다는 설명이다.


“빚내서라도 움직여라”

사람이 한 조직에 오래 있거나 한 우물만 파다 보면 시야가 좁아진다. 안식년 휴가를 가거나 유학을 가는 것은 전문지식을 쌓기 위한 것이지만 한편에서는 자신을 되돌아보고 시야를 넓히는 계기가 된다. 돈이나 시간 등 현실적인 문제가 있더라도 과감한 선택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조귀제 조직국장은 “여행이든 뭐든 돈을 빌려서라도 새로운 것들을 접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렇게라도 챙기지 않으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듯한 생활에서 벗어나기 힘들다”며 “한 번만 해 보면 자신만의 좁은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유선 소장도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한 걸음 물러나서 자신과 조직을 되돌아볼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문했다.


“주변 활용 학습해야”

우태현 한국노총 중앙연구원 연구위원은 대학원 진학을 포함한 공부에 보다 많은 시간을 투자할 것을 권했다. 그는 “학위가 모든 미래를 보장할 수는 없지만 아직까지 노동판에서 라이선스가 가지는 의미를 무시할 수는 없다”며 “용돈을 줄이거나 빚을 내는 한이 있더라도 하고 싶은 공부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주위 동료들과 학습모임을 만들어 운영하는 방법을 제안했다. 우 연구위원은 “주위에 학습모임을 하는 후배들이 있는데, 치열한 토론이나 학습분위기는 미흡한 것 같다”고 아쉬워했다. 노조 등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실시하는 사업을 적극 활용하라는 의견도 나온다. 예컨대 노조가 마련한 각종 좌담회나 토론회·강연회에 적극 참여하라는 것이다. 활동가들이 실무를 준비하면서 정작 행사에는 빠지거나, 행사 내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한다는 지적이다.

이주호 전략기획단장은 “최근에는 노조가 다뤄야 할 의제가 많아지면서 공부해야 할 내용이 더 많아졌다”며 “어차피 해야 하는 실무작업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