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이 드디어 국회 청문회장에 들어섰다. 커닝 페이퍼대로 읽은 그를 두고 온라인은 뜨거웠다. 다음날 조·중·동도 청문회 소식을 비중 있게 다뤘다. 동아일보는 1면에 사진을, 조선일보는 3면에, 중앙일보는 10면으로 지면은 뒤로 밀렸지만 톱기사로 다루면서 <‘즉답 말고 어눌하게...’ 조남호 답변 커닝>이라는 풍자 섞인 제목과 함께 ‘답변 지침이 적힌 문건을 꺼내 든’ 조 회장의 얼굴과 커닝 페이퍼를 동시에 사진으로 잡았다.

방송은 신문과 다르다. 전적으로 텍스트에 의존하는 신문의 딱딱함보다는 요즘 세대는 그림이 있는 방송뉴스에 쉽게 빨려든다.
최근 주식 폭락으로 자살자가 늘었다. 선정적 제목달기의 달인 조선일보는 지난 20일자 10면 한 면을 털어 <부장은 빈 회의실, 대리는 화장실서 “주식, 주식”>이라는 제목으로 이런 세태를 적나라하게 지적했다. 이 기사의 문패는 ‘주식 공화국, 대한민국’이었다. 조선일보는 그 옆에 30대 가장의 주식폭락 비관자살 내용을 ‘주식 자살’이란 제목으로 실었다. “충북 옥천군 군서면 한 축사에 세워져 있던 화물트럭에서 전모(37·축산업)씨가 번개탄을 피워 놓고 숨진 채 발견됐다”는 사례도 나온다. 그런데 신문기사만으로는 안타까운 사연이 충분히 전달되지 않는다.

반면 방송뉴스는 숨진 전씨가 일하던 낡은 축사와 낡고 찌그러진 1톤 트럭으로 화면을 채웠다. 주식 비관자살이라고 하면 국민들은 말쑥하게 차려입은 증권사 직원이나 사무직, 공기업 직원을 떠올린다. 뉴스 화면은 그런 일반의 고정관념을 일거에 분쇄했다. 널뛰는 가축 시세 때문에 농약병 마시고 자살할 법한 남루한 시골농장에서 ‘주식 비관자살’이라니. 그만큼 역설적 충격이었다. 그래서 방송기사가 힘이 있다.

지난해 말 기준으로 주식하는 국민은 479만명이다. 경제활동인구의 20%쯤 된다. 펀드나 주식연동 보험에 든 사람까지 합치면 우리 경제활동인구 중 절반이 주가에 일희일비한다.

18일 한진중 조 회장 청문회 날 MBC 뉴스데스크는 9시10분 이전에 관련기사를 다뤄 면피했다. 그런데 KBS 9시뉴스는 언론이기를 포기했다. 9시39분 22번째 꼭지로 한진중 청문회를 다뤘다. 입을 다물지 못할 지경이었다. 이 시간대면 수도권을 제외한 지방엔 방송이 나갔는지도 장담하기 어렵다. 그날 헤드라인은 ‘무상급식 부재자투표 시작’이었다. 화면은 하나 가득 대통령과 영부인이 환하게 웃으며 투표하는 장면으로 채워졌다. 무상급식을 주제로 한 양비론에 기대어 내용도 없는 헤드라인 두 꼭지 다음엔 날씨에 관련된 뉴스가 세 꼭지 연달았다.

‘정부의 전세대책이 실효가 없다’거나 ‘인터넷 스폰카페 폐쇄’, ‘자동차 공인연비 뻥튀기’ 같은 하나 마나 한 기사가 7·9·12번째 꼭지를 차지했다. 심지어 연년세세 나오는 ‘추석 앞두고 예초기 사고 주의’ 기사도 13위였다. 그날은 날씨 뉴스도 참 많았다. 빅5 안에 세 꼭지를 넣고도 모자랐는지, 남의 나라 ‘일본의 늦더위 기승’을 조남호 회장 청문회보다 앞에 배치했다. 도쿄특파원 하면 그래도 경륜 꽤나 있는 기자인데, KBS 도쿄특파원은 그날따라 땟거리도 참 궁했나 보다.

온라인 공간이 뉴스밸류를 가늠하지 않고 시시콜콜한 연예인 신변잡기를 헤드라인으로 올려 청소년들에게 균형 잡힌 사회상을 심어 주지 못한다는 비판을 자주 듣지만, 주류 매체인 국가기간방송사가 이런 식으로 뉴스를 편집하는 걸 두고 뭐라고 해야 할까.

이러고도 또 정권 바뀌면 “국민 여러분, 그동안 죄송했습니다”라고 머리 조아리고, 진보도 아닌 무늬만 목소리만 좌파인 정권 편드는 프로그램을 마구 쏟아낼 텐가. KBS의 양식 있는 한 기자는 4·19 때도 그랬고, 10·26 때도 그랬고, 6·10 때도, 김대중·노무현 정권 때도 그랬던 정권방송의 오명을 씻으려는 노력은 이제 국민들께 습관적 거짓말로 비춰질 수밖에 없다며 이제 KBS는 어떤 정권이 들어서도 회복하기 어려울 만큼 내상을 크게 입었다고 자평했다.

내일 또 4차 희망버스가 있다. 그렇게 편집 장난이나 치려면 아예 침묵하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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