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문] 지난달 생활고에 시달리던 영상활동가 '숲속 홍길동' 고 이상현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됐다. 고 이상현씨는 프리랜서 활동가로, 비정규직 운동 활동가로 고단한 삶을 이어 온 것으로 밝혀졌다. 비단 이씨만의 문제는 아니다. 노조나 노동단체에 채용돼 일하는 ‘정규직 활동가’들의 현실도 그리 녹록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최저임금도 안 되는 임금을 받고 있는 활동가들이 적지 않다. 웬만한 조직이 아니면 재충전이나 자기계발 기회는 꿈도 꾸기 힘들다. 돈 없어 조합원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고, 불투명한 미래에 가슴앓이를 하는 활동가들의 모습은 노동운동의 또 다른 사각지대다.

 
민주노총 소속 한 지역노조에서 위원장을 맡고 있는 김아무개(37)씨는 최근 민망한 일을 겪었다. 사업장을 방문해 회의를 하고 난 뒤 사무실로 돌아오던 중 승용차에 기름이 떨어졌다. 차에 빨간불이 들어온 상황에서 사무실까지 갔다가는 도로에 차가 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의 지갑에는 돈이 한 푼도 없었다. 체크카드도 무용지물이었다. 노조 사정으로 급여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돌려막기’로 불어난 카드빚 탓에 몇 해 전부터는 신용카드도 쓰지 못하는 터였다. 결국 주유소 앞에 차를 세우고 동생에게 연락했다. 3만원을 온라인으로 송금받은 뒤에야 주유를 할 수 있었다.

“톨비 없어 조합원에게 빌려”

김씨가 위원장을 맡고 있는 노조의 조합원은 400여명이다. 중소·영세 사업장이나 용역회사 노동자들이 대부분이다. 최저임금을 겨우 받는 이들이 낸 조합비로 김 위원장이 받는 월급은 85만9천원.

그런데 각종 회의와 교섭·상담 등을 위해 하루 평균 100킬로미터 이상을 운행하며 그가 쓰는 자동차 연료비는 한 달에 40만~50만원에 이른다. 노조에서 매달 지원하는 기름값 15만원을 빼더라도 한 달 소득의 절반 가까이를 차에 털어 넣어야 한다.
 
노조 재정 문제로 월급이 밀리는 날도 있다. 그는 “일상적인 생활비는 덜 먹고 안 쓰면 되지만, 위원장으로 해야 하는 사업을 하다 보면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고 아쉬워했다.

수천원에 불과한 고속도로 톨게이트비가 없어 일단 하이패스 통로를 무단 통과한 뒤, 나중에 한국도로공사에 비용을 지불할 때도 있다. 회의나 교섭 등을 위해 사업장을 방문했다가 조합원들에게 기름값이나 톨게이트비를 빌리는 일도 종종 있다고 한다.
김 위원장은 “주유비나 톨게이트비도 없는 위원장에게 조합원들이 믿음을 가질지 걱정된다”며 “그럴 때마다 몰려드는 자괴감과 스트레스는 이루 말할 수 없다”고 토로했다.



노조간부들에게도 ‘양극화’가

지금은 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그의 직책은 정확히 말해 직업활동가다. 지금의 노조에 조직국장으로 채용된 뒤 지역노조 위원장이 된 케이스다.
소속 조직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노조에 채용돼 직업적으로 일하는 활동가들의 임금수준은 매우 낮다. 같은 활동가라도 대규모 사업장에서 전임으로 일하거나, 상급단체에 파견돼 현장에서 일할 때만큼의 급여를 보장받는 ‘조직 출신’ 활동가들과 비교하면 임금이 턱없이 적다.

2008년 한국노총이 중앙과 산별연맹·지역본부와 지부 등에서 일하는 상근간부 30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파견직 간부의 급여수준을 100%로 했을 때 채용직 간부는 61.8% 수준에 머물렀다. 채용직 중에서도 지역본부와 지부, 지역법률상담소 활동가들의 평균임금은 150만원으로, 파견직(348만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최근 2~3년간 금융위기 등으로 한국노총 채용직 간부들의 임금이 동결된 점을 감안하면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나마 상급단체 간부들은 적어도 최저임금 이상은 보장받는다. 김 위원장처럼 지역노조에서 일하거나, 노조가 아닌 노동관련 단체에서 일하는 대다수 활동가들의 한 달 급여는 100만원도 되지 않는다.

“저임금보다 힘든 건 불투명한 미래”

노동운동 경력이 20년 가까이 된 한국노총 소속 활동가인 A씨. 그의 월급은 200만원 정도다. 만족할 만한 수준은 아니지만 활동비는 그럭저럭 나온다. 하지만 그를 고민스럽게 하는 것은 임금이 아니라 ‘불투명한 미래’다. 대학을 졸업하고 열정만으로 노동운동의 길에 들어섰지만 최근에는 활동가라기보다는 ‘직원’이 된 느낌이 든다고 한다. 보다 전문성을 갖춘 활동가로 성장하고 싶지만, 점점 밑천이 바닥나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고 했다.

재충전과 학습의 기회를 갖고 싶지만 날마다 떨어지는 지도부의 사업지시를 이행하다 보면 눈코 뜰 새가 없다. 동료들과 학습모임을 만들거나 자비를 들여 대학원이나 노무사 공부를 하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다. A씨는 “학생운동을 했던 경험과 자발적인 의지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다”며 “안식휴가라든가, 학자금 지원제도 등을 실시하고 있는 일부 산별연맹 활동가들이 부럽다”고 말했다.

저임금보다 노동운동 활동가들을 괴롭히는 것은 전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이다. 한국노총 조사에 따르면 채용직의 경우 절반 이상인 54.3%가 "조직생활을 하면서 역량 재충전의 기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는다"고 답했다. 88%는 "전문성 강화를 위해 조직 차원의 제도 및 노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했다. 상근간부들은 역량 강화를 위한 방안으로 ‘교육기회 확대 등 전문성 강화’(41.6%)를 가장 많이 꼽았다. ‘경제적 보상 확대 등 활동가로서 사기진작’(33.6%)을 원하는 응답보다 많았다.

민주노총 상근자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한국노동사회연구소가 2006년 민주노총의 중앙과 산별연맹·지역본부 상근자 136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활동하면서 느끼는 어려움 두 가지를 선택하라는 질문에 ‘입장차이에 따른 갈등’이 42.1%로 1위를 차지했다. 다음으로는 ‘전문성 부족’과 ‘재충전 어려움’이 각각 36.8%로 뒤를 이었다. ‘생활보장의 어려움’(15.8%)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활동가 임금·승진 보장해야”

활동가들의 저임금과 전망 부재에 대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을 경우 인력자원이 고갈되고 장기적으로는 노동운동에까지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노동운동에 지속적으로 활동인력을 공급해 왔던 학생운동이 쇠퇴한 상황에서는 활동가들을 키우거나 능력을 높이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활동가들의 임금과 관련해서는 민주노총 금속노조 모델이 주목받고 있다. 금속노조는 전 조합원의 평균 기본급 인상률만큼 사무처 채용직 활동가들의 기본급 인상에 적용한다. 노조 관계자는 “많이 받는다고 볼 수는 없지만 다른 연맹 소속 활동가들에 비하면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고, 지속적인 임금인상을 보장받고 있다”고 말했다.

활동가 육성과 자기계발 확대라는 측면에서는 미국서비스노조(SEIU)의 신규 조직활동가 양성 프로그램(WAVE)을 눈여겨볼 만하다. SEIU는 98년부터 조직확대를 위해 1년 교육기간의 WAVE 프로그램을 시행해 왔다. 1년에 180명 정도를 채용해 교육을 한다. 활동가 한 명을 교육하는 데 약 1억원의 비용을 투입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교육을 통해 배출된 활동가들은 지역으로 흩어져 새 조합원들을 조직했고, 그 결과 96년 100만명이었던 조합원수가 2007년에는 190만명으로 급증했다. SEIU는 활동가들에게 여느 기업 못지 않은 급여를 줬고, 교육이 끝난 2~3년차 활동가들에게도 집중교육을 한 뒤 승진과 급여인상을 보장했다.

WAVE 프로그램을 본따 우리나라에서 실시된 것이 민주노총이 2005~2007년 실시한 전략조직화 사업이다. 조합원 1인당 1만원씩 낸 돈으로 기금을 조성해 20명 이상의 활동가를 교육한 뒤 각 산별연맹에 배치했다. 민주노총이 3년간 이들의 급여를 지원했다.
하지만 민주노총의 전략조직화 사업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교육생 중 절반 정도가 중도에 그만뒀고, 남은 간부들마저 조직화 사업보다는 산별연맹의 일반업무에 투입됐다. 게다가 민주노총의 급여지원이 끝나자 일부 연맹이 활동가들의 임금을 주지 못하는 사례도 생겨났다. 민주노총 관계자는 “활동가들의 사업과 교육, 임금을 총연맹이 끝까지 책임지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WAVE 프로그램은 활동가 지원이라는 목적보다는 노조 생존과 조직확대를 위해 시작됐다. 우리나라 노동운동에 시사하는 의미가 적지 않다. 진숙경 성균관대 HRD센터 연구위원은 “미국서비스노조가 신규 활동가는 물론이고 기존 활동가들에 대한 교육훈련 마인드를 가졌다는 사실은 국내 노동계가 주목해야 할 대목”이라고 말했다.

봉사하는 활동가들은 널려 있다?
기존 노동계 인식, 경고 목소리 커져
활동가들에 대한 처우개선과 관련해 가장 많이 나오는 지적이 기존 노동계나 상급단체 고위 관계자들의 ‘저급한 인식’이다. 활동가를 ‘봉사하거나 희생하는 사람’ 정도로 치부한다. 이런 인식은 활동가들이 중간에 그만둬도 손쉽게 인력을 다시 구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활동가들의 임금이나 자기계발에 소홀한 분위기가 만들어지는 배경이다.
물론 우리나라 노동계는 재정이 열악하다. 재정을 집중할 수 있는 산별노조 운동의 약화, 낮은 수준의 의무금 납부율이 활동가들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꺼리게 만든다. 무엇보다 활동가들을 바라보는 노동계의 낮은 인식이 개선돼야 한다. 노동계의 한 관계자는 “인재풀 부족으로 활동가를 손쉽게 채용할 수 없는 시기가 도래하면 활동가 육성에 지원을 강화해도 소용 없는 상황이 빚어질 수 있다”며 “활동가에 대한 편협한 인식이 하루빨리 바뀌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노조나 노동운동단체의 지도자들이 현실적인 능력 등을 인정한 상태에서 활동가 인력을 운용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노조가 아닌 노동운동단체의 경우 조합비 등 고정적인 수입원이 없기 때문에 노조보다 저임금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럼에도 사업범위를 넓히고 활동가를 추가로 채용한다. 추가 수입은 없는 상황에서 기존 급여를 여러 명이 나눠 가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민주노총의 한 활동가는 “인력이 많아지면 자연스럽게 벌여 놓는 일도 많아지고, 저임금과 고강도 노동이라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게 된다”며 “노동단체 지도자들이 무리하게 욕심내지 않고 선택과 집중을 하는 것이 현실적인 대안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김학태 기자

저작권자 © 매일노동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