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석행(53) 전 민주노총 위원장은 불운한 사람이다. 두 차례나 민주노총 임원직에서 불명예 하차한 뒤 결코 가볍지 않은 심리적·경제적 고통을 겪었다. 정신과 치료까지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강연료만으로는 생활이 빠듯했다. 그런 그에게 변화가 나타났다. 회사에 다니기 시작하고, 인천시 노동특별보좌관이라는 명예직도 수락했다. 십수년간 유보해 온 ‘가장 노릇’도 다시 시작했다. 무거운 책임감에서 벗어나 가볍게 살아가고 있다는 ‘노동자 이석행’.
<매일노동뉴스>가 지난달 23일 오후 인천남동공단에 있는 (주)우경일렉텍 사무실에서 그를 만났다.

- 오랜만이다. 어떻게 지내나.
“정신없이 바쁘다. 낮에는 친구가 사장으로 있는 히터 제조업체에서 기술고문으로 일한다. 평생 노동운동만 했던 내가 기술고문이라니 사람들이 의아해한다. 인천 소재 대학교수 같은 전문가들과 중소제조업체를 잇는 산학협력의 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다. 저녁에는 인천시장 노동특별보좌관으로 일한다. 월급은 받지 않는다. 강연 제의가 들어오면 강연도 하고, 사람들 만나 술도 많이 마신다. 지난해부터는 인천대 부설 사회교육원에서 학점은행제 수업을 듣고 있다. 아들뻘 되는 젊은이들과 함께 공부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다.”

이 전 위원장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총파업 집회를 주도하고, 116차례에 걸쳐 전국 이랜드 매장 점거투쟁을 주도한 혐의로 지난 2008년 12월 구속돼 2009년 3월에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고 출소했다.

- 히터공장에는 어떻게 들어갔나.
“감옥에서 나온 뒤 민주노총 위원장을 사퇴하고 공황상태에 빠졌다. 정신과 치료를 1년 가까이 받았다. 근근이 받는 강연료로는 애들 셋을 키우기도 쉽지 않았다. 친구들이 '저러다 석행이 폐인되겠다'고 걱정을 많이 했다. 전북기계공고 동문들 중에 인천에 자리 잡은 친구들이 여럿 된다. 지난해 7월쯤 친구들이 술이나 먹자고 불러내더니 취업을 ‘강요’했다. 친구들이 운영하는 회사 5곳을 추리더니, 그중에 마음에 드는 곳을 고르라고 했다. 그렇게 취직이 결정됐고, 정식 출근은 지난해 9월부터 시작했다.”

- 중소업체에서 직접 일해 보니 어떤가.
“나는 사장은 못하겠더라. 그만큼 중소기업 운영하기가 힘들다는 얘기다. 특히 인력난이 심각하다. 하나하나 가르쳐 놓으면 큰 회사로 가 버리고, 괜찮은 인재가 들어왔다 싶으면 경력만 쌓고 쏙 빠져 나간다. 이런 악순환을 개선하기 위해 인천시와 인천 소재 대학, 노조와 사용자단체 간 MOU 체결을 추진하고 있다. 노조가 구직자들을 모으고 경총이 구인업체를 모으면, 지방자치단체와 대학이 교육을 통해 현장 투입이 가능한 인력을 양성해 보내 주는 것이다. 노동시장에 개입할 때 노조도 힘을 가질 수 있다.”

송영길 인천시장은 지난해 11월 그를 노동특별보좌관으로 임명했다. 이 전 위원장은 “출소 후 첫 러브콜이었다”고 말했다. 그만큼 ‘성폭력 집행부’라는 딱지는 노동운동은 물론 그에게도 적잖은 상처를 남겼다.

- 송영길 인천시장 노동특별보좌관으로 일하고 있는데.
"봉사활동이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일하고 있다. 인천시로부터 돈은 받지 않는다. 일 때문에 시청에 갈 때도 내 돈으로 주차비를 낸다. 노동운동한다고 살아온 세월이 있기 때문에 지자체장 개인을 위해 일하는 것은 맞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만 20년 넘게 살아온 인천지역의 노동자들을 위해 뭔가 기여하고 싶었다. 시청에서는 '정책특보' 소리를 들을 만큼 의욕적으로 일하고 있다. 민주노총 전 위원장 이석행보다는 노동자 이석행의 행보로 이해해 달라."

- 주로 어떤 활동을 하나.
“가장 역점을 두고 추진하는 사업은 인천시 산하 공공기관의 민간위탁을 단계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다. 오늘도 인천메트로 청소용역업체 사장이 퇴직금을 떼먹고 도망간 일 때문에 교섭 중재차 인천메트로에 다녀왔다. 하지만 지자체의 사업이 떼인 돈 받아 주는 수준에 그쳐서는 안 된다. 인천시는 3개년 계획을 세워 산하 공공기관의 민간위탁 계약을 철회하고 직접고용으로 전환할 계획이다. 지자체장이 의지를 갖고 밀어붙이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다. 공공부문이 선도적으로 간접고용을 줄여 나가면, 민간기업도 따라올 수밖에 없다.
GM대우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고공농성 사태를 마무리짓는 데에도 일조했다. 당시 송 시장이 직접 마이크 아카몬 GM대우 사장을 설득했고, 그 결과 교섭창구가 열렸다. 송 시장은 눈이 오거나 기온이 떨어지면 늦은 밤에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추운데 잠이 오세요? 선배님이 나서서 어떻게 좀 해 보세요'라며 안절부절해했다. 이렇게 지자체와 노동계가 힘을 모아 분규를 해결한 사례는 거의 없다. 좋은 선례가 만들어졌다고 본다.”

- 송 시장과는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인가.
“90년 광주에서 열린 이철규 열사 추도식장에서 송 시장을 처음 만났다. 내가 노동자 대표로 연설을 했는데, 연설이 끝나자 송 시장이 나를 찾아왔다. 연설이 감동적이었다고, 사인이라도 받고 싶다면서…. 송 시장이 전대협 활동을 하던 때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이 지금까지 왔다. 내가 감옥에 가거나 수배 중일 때 송 시장 부인이 우리 집에 쌀을 놓고 가기도 했다.”

- 특보 활동과 관련해 정치적 행보를 위한 수순 아니냐는 시선이 있다.
“촛불시위 등과 관련해 아직도 대법원 재판을 받고 있다. 지금도 집행유예 기간이다. 정치활동은 하고 싶어도 못한다. 비례대표 자리 하나 받고 싶어 이러는 게 아니다. 물론 나의 활동이 그런 식으로 비춰질 여지는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나에게 직접 '정치하려는 거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없었다. 말을 걸기는커녕 출소 뒤 내 옆에 오는 것마저 꺼리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내 옆에 오기만 해도 ‘성폭력 집행부’라는 주홍글씨가 전염이라도 되는 양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 민주노동당 당원직은 유지하고 있나.
“당원직은 유지하고 있지만 일체의 당 활동은 하지 않는다. 강연을 가면 노동자들이 나더러 '왜 민주노동당 최고위원을 하지 않고 민주당 보좌관을 하느냐'고 묻는다. 나도 묻고 싶다. 민주노동당 안에 내 자리가 어디에 있느냐고. 출소 뒤 민주노동당으로부터 그 어떤 형태의 제안도 받아 본 적이 없다. 지금의 인천시장은 야권단일화의 결과물이다. 민주노동당 출신인 인천 동구청장과 인천 남동구청장도 마찬가지다. 왜 민주당 밑에서 일하냐고 하지 말고, 야권단일화의 차원에서 봐 줬으면 좋겠다. 노동자로서 내 철학과 사상은 변함이 없다.”

이 전 위원장은 앞으로도 민주노총의 공식활동에는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민주노총 성폭력 보고서에 ‘김○○’으로 표기된 가해자에 대해 입을 열었다.

- 위원장 사퇴하고 2년여가 지났다.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감옥에 있으면서 성폭력 사건에 대한 최고 책임자인 내가 모든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이유로 출소한 뒤 민주노총 대의원대회에 자청해서 찾아간 것이다. 진심으로 고개 숙여 피해자에게 사죄했다.
이와 별개로 나는 이 사건의 가해자에 대한 아픔이 있다. 그를 민주노총으로 이끈 사람으로서 그에 대한 인간적 믿음까지 포기할 수는 없다. 사건이 공론화된 뒤 가해자의 가족, 특히 자녀들이 큰 상처를 받고 방황했다. 나는 아직 감옥에 있는 가해자와 그 가족이 다시 정상적인 생활로 돌아갈 수 있도록 책임을 다할 의무가 있다. 이들이 생활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 민주노총의 모든 공식적 활동에 참여하지 않을 생각이다.”

- 이석행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노동자 이석행으로 돌아오니 행복하다. 민주노총 사무총장 때나 위원장 때를 돌아보면, 그때는 책임감과 욕심에 눌려 살았다.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지금은 그런 무게감에서 해방돼 몸과 마음이 가볍다. 물론 나에 대해 우려의 시선을 보내는 분이 적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을 탓하거나, 따로 변명을 할 생각은 없다. 단, 정치활동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밝혀 두고 싶다.
84년 대동중공업 조합원들과 첫 파업을 하면서 약속한 게 있다. 죽을 때 관 위에 ‘노동자 이석행’이라는 여섯 글자 새기고 가겠다는 것이다. 혼자 살아보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릴 수 없는 이유다. 나에 대한 격려와 비판 모두 고맙게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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