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는 국내 수주량을 3년치 연속해서 확보토록 최대한 노력한다. △회사는 현 수준의 적정인력을 유지하며 경영상의 이유로 국내공장의 축소 및 폐쇄 등 인위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는다. △회사는 해외공장이 운영되는 한 조합원의 정리해고 등 단체협약상 정년을 보장하지 못할 행위를 하지 않는다. △경영악화 등으로 생산규모 축소나 공장폐쇄가 불가피할 경우 해외공장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

한진중공업과 금속노조가 지난 2007년 3월 체결한 ‘해외공장 관련 특별단체교섭 합의서’에서 국내 물량확보와 조합원들의 고용보장에 대해 명시한 내용이다. 당시 한진중과 노조는 해외생산 확대가 국내 노동자의 고용에 미치는 부작용을 최소화하자는 취지로 완성차 노사의 특별합의문을 벤치마킹해 이 같은 합의서를 작성하고 서명했다.

3년여가 지난 현재, 합의서는 사실상 휴지 조각이 돼 버렸다. 3년치 물량을 끊이지 않고 확보하겠다던 한진중 부산 영도조선소의 지난해와 올해 수주 물량은 0척. 내년 상반기면 현재 작업 중인 선박의 건조가 대부분 완료돼 수주 잔량이 고갈될 것으로 전망된다.

경영상의 이유로 구조조정을 하지 않겠다던 약속도 깨졌다. 한진중은 올해 초 희망퇴직과 설계부문 분사로 600여명을 내보냈고, 내년 2월까지 400명을 정리해고하겠다고 밝힌 상태다. 올 한 해 동안 한진중 소속 울산조선소와 인천 율도조선소가 폐쇄됐고, 부산 영도조선소와 다대포조선소에서 부분휴업이 이어지고 있다.

조선업계 해외진출, 국내 정규직 고용까지 위협

우리나라 조선업체들의 해외진출 유형은 크게 △해외 조선소 건설 △해외 블록공장 건설 △해외 조선소 인수 △현지 시장공략을 위한 기술제휴 등으로 구분된다. 2000년대 중반 조선업계가 유례없는 호황을 누리며 해외투자를 확대할 당시 한진중 역시 해외공장 건설에 공격적으로 나섰다. 한진중의 필리핀 수빅조선소와 STX조선의 중국 다롄조선소는 국내 업체가 해외에 조선소를 건설한 대표적 사례다. 이 중 한진중의 경우는 해외공장 확대가 국내 정규직 노동자들의 고용을 직접적으로 위협한 첫 사례다.

한진중 수빅조선소는 2006년 건설과 동시에 선박 수주를 받기 시작했다. 지난달 말 현재 61척의 수주잔량을 보유하고 있다. 올해만 29척을 신규로 수주했다. 단협에 명시된 ‘3년치’ 물량은 국내가 아닌 해외공장에 쌓여 갔다. 수빅조선소로 물량이 집중되는 사이 한국의 노동조합은 ‘고용 안전판’ 마련에 나섰다. 그 결과 만들어진 것이 바로 ‘해외공장 관련 특별단체교섭 합의서’다. 당시 교섭에 참여했던 최우영 금속노조 한진중공업지회 사무장은 “조선업계가 최대 호황이었던 그때만 해도 영도조선소에는 3년치 물량이 확보돼 있었다”며 “회사는 ‘국내 산업 공동화’ 등을 주장하며 해외공장 확대에 반대해 온 노조의 입을 막기 위해 합의서에 서명해 놓고, 그 뒤 조선업계가 침체에 빠져 들자 합의 내용을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 버렸다”고 주장했다.

서둘러 찾아온 '어두운 미래' … 노조는 준비 부족

특별단체교섭 합의 이후 국내외 물량 조절을 위한 한진중 노사의 후속협의는 진행되지 않았다. 자동차업계 노조들이 해외생산 확대에 따른 국내 고용안정 방안의 일환으로 ‘해외생산 비율제’와 같은 제도적 보완책을 모색해 온 것과 달리, 조선업계 노조들은 끝날 줄 모르는 호황으로 미래를 준비하지 못한 셈이다.

하지만 상황은 급반전했다. 2008년 세계 금융위기 여파로 해운시장이 불황의 늪에 빠진 뒤 조선업계가 어둠의 터널로 빨려 들기 시작했다. 신규선박 수주는 뚝 끊겼고, 선박업주들의 발주 취소가 이어졌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해 말 조선 경기가 되살아나기 시작하면서 국내의 다른 조선소들은 새로 배를 짓기 시작했지만, 한진중만은 사정이 달랐다. 모든 물량이 비용경쟁력을 앞세운 수빅조선소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회사측은 “국내 노동자들의 임금이 너무 높아 영도조선소로 수주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구조조정에 돌입했다. 국내 노동자의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한 필리핀의 값싸고 풍부한 인력, 초대형 도크에서 이뤄지는 수빅조선소의 압도적인 생산능력은 ‘대한민국 조선산업 1번지’로 불리는 영도조선소를 존폐의 기로에 서게 했다.

유장현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교선부장은 “노동계는 대책 없는 해외공장 확대가 국내 제조업 공동화를 부추기고 노동자들의 고용을 위협한다고 주장해 왔지만, 기업들은 대책을 찾는 시늉조차 하지 않았다”며 “법과 제도가 자본에게 힘을 실어 주고 있는 마당에 단체협약이 무슨 힘을 발휘할 수 있겠냐”고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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