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냄새 없어진 조직, 우리의 미래는 있는 걸까”

외환위기 10년, “동료는 사라지고, 업무는 늘어나고”

2007-09-07     
지난 7월에는 자본시장통합법(자통법)이 국회를 통과했다. 외부충격으로 마지못해 개방하는 단계를 벗어나, 법・제도적인 측면에서까지 경쟁을 공식화한 것이다. 은행과 증권, 보험으로 대표되는 금융산업의 업종 간 경계도 허물어지고 있다. 금융회사들은 치열한 생존경쟁에 노출됐다. 그런 가운데 한 쪽에는 잇단 구조조정에 숨죽이고, 새로운 업무영역 개척에 고단한 금융노동자들이 있다. 과연 그들의 삶은 어떻게 변해 왔을까. <매일노동뉴스>가 그들의 취중진담을 듣기 위해 ‘술자리 톡톡톡!’ 코너를 마련했다. 지난 9일 저녁,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6명의 금융노동자들이 모였다. <편집자>

사회 : 신현경 기자 joeun@, 정병기 기자 gi@
정리 : 김봉석 기자 seok@
사진 : 정기훈 기자 dongtal@



조광휘(44) 국민은행 효창동지점 차장
사회 : 예전과 비교해 달라진 것이 있다면.

이영 : 다니던 회사(대투증권)가 2005년 하나금융에 합병된 후 2년 동안의 변화가 이전 10년보다 많다. 가장 힘든 것은 본 업무보다 주변 업무가 더 많다는 것이다. 매일 카드·보험 상품을 팔아야 한다. 금융지주 하에 있으니 은행업무가 많아졌다. 은행이 펀드를 팔아야 주가가 오른다. 그러니 실적압박이 있을 수밖에 없다. 배부른 소리라고 하겠지만 사실 진짜 힘들다. 우리 회사는 3번이나 ‘곡소리’가 날 정도의 어려움을 겪었다.

조광휘 : 공감한다. 외환위기 이후 영업점에서 파는 상품이 늘어났다. 또한 외국자본이 들어오면서 단기성과주의가 팽배해졌다. 주주들을 챙겨야 하기 때문이다. 예대마진(예금과 대출의 금리 차이)으로 먹고 살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지금은 수수료 비중이 크다. 예전엔 몸은 괴로웠지만 마음은 편했다. 외환위기 이후로는 실적을 올려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에 마음이 괴롭다. 요즘 적금의 80% 이상이 적립식 펀드다. 예금에 가입하면 끝났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은 가입순간부터 끝날 때까지 일일이 관리를 해줘야 한다.

이영 : 맞다. 펀드, 쉬울 것 같지만 투자하는 순간부터 머리 싸매고 있어야 한다. 증권맨들 진짜 힘들다. 예전엔 주가가 떨어지면 고객들이 칼을 갖고 와서 위협하는 경우도 있었다. 각서 써주고 손해금액을 물어주곤 했다.

조광휘 : 외환위기 이후 은행원수가 많이 줄었다. 보통 20여명씩 있었던 부서에 이제는 10~12명이 일한다. 전에는 직원-과장-차장 등 삼선구조였지만 지금은 혼자 업무를 하고 있다. 사람이 없으면 창구까지 커버해야 한다. 사람이 줄어 어쩔 수 없다. 직원들이 고통을 호소한다. 요새 암환자들이 속출하고 있다.

이병무 : 인수합병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2천명에 이르던 직원들이 외환위기 이후 8백명으로 줄었다. 일에 대해 성과를 내야 한다는 압박감이 높아졌다. 게다가 업무 벽이 없어지면서 보험·펀드 등에도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노동강도가 높아진다고 수익이 많이 나는 건 아니다.

최경순 : 올해 3월1일자로 정규직이 됐다. 우리은행만 4번 입사했다. 행번만 4개다. 78년에 처음 상업은행에 입행했다가 결혼하면서 퇴직했다. 또 재입사해 98년 12월 외환위기 때 명예퇴직했다. 그런데 다음날 계약직으로 입사했다. 그리고 올해 3월 정규직으로 전환됐다. 늦은 나이에 운이 좋게도 다시 정규직이 됐다.

최경순(47) 우리은행 고객만족센터 상담행원
연일 계속되는 ‘실적 공포’

사회 : 혹시 죽고 싶을 정도로 힘들었던 순간이 있나.

조광휘 : 매일 그런 생각을 하지만 옆에 있는 아내와 아들, 딸 얼굴 보면서 참고 있다. 살아야겠다고 생각한다.(일동 웃음)

이병무 : 바쁠 때면 보름 동안 꼬박 집에 못 들어 갈 때도 있다. 잠자리에 들 때 ‘내일 못 일어나면 과로사가 되겠지’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다른 직원들도 나 같은 강박감을 갖고 있다.

이영 : 노동조합 활동할 때가 가장 힘들었다. (대투증권은 2005년 하나금융지주에 매각됐다.) 위원장으로 있을 때 암으로 죽은 직원이 있었는데 친분이 두터웠다. 괴로웠지만 즐겁게 살자는 생각을 하며 견뎠다. 그런데 이번에는 후배가 자살을 했다. 우울증 때문이라고 했다. 그땐 정말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

(윤우석 대리가 30분 늦게 도착했다. 윤 대리가 등장하자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던 조광휘 국민은행 차장이 “지금까지 자기소개하고 노래도 다 불렀다”며 너스레를 떨기 시작했다. 참석자 일동, 크게 웃었다.)

김경중 : 국민은행과 주택은행이 합병된 이후 달라진 것은 팀은 없어지고 개인만 남았다는 것이다. 과거에는 실적이나 평가를 팀별로 진행했다. 팀워크가 중요했다. 요즘은 그렇지 않다. 지금 연체관리 분야는 하루에 한 번씩 일등부터 꼴찌까지 전 팀원에게 실적을 공지한다. 퍼센트를 계산하고 보기 좋게 그래프까지 그려서 준다. 어떤 날은 하위 10%를, 어떤 날은 20%를 순서대로 불러서 센터장이 직접 질책을 한다. 나는 실적이 중상위에 있었기 때문에 포상을 받곤 했는데, 매일 밑에 깔려 있는 사람들은 퇴근하고 나면 다음날 나오기도 싫다고 했다. 실적공포 때문이다.

사회 : 은근히 자랑하는 것 같다. 상위권이었다고.(일동 ‘맞다’고 맞장구치며 웃음)

김경중 : 당사자들 얘기를 들으면 절대 웃지 못한다. 그야말로 공포다. 매일같이 불려 들어가는데 얼마나 두렵겠나. 서너 달 계속되면 자기가 무능력하다는 생각에 빠진다.

이영 : 외환위기 이후 증권사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다. 본부장이 직원을 직접 불러 다그친다. 괴로워서 자살하는 사람들이 많다. 회사가 쉬쉬해 사람들이 잘 모를 뿐이다.

조광휘 : 국민은행에서도 2005년에 2천2백명이 정리해고됐다. 내 옆에 있던, 정말 일 잘하고 몇 십년 동안 고생했던 선배들이 명확한 기준도 없이 잘려 나갔다. 그런 일 한 번 겪고 나면 정말 일할 마음 안 생긴다. 내가 거기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당시 며칠 밤을 새웠다. ‘이런 조직에서 일을 해야 하나’ 고민 많이 했다. 특히 금융권에 외환위기 이후에 후선배치제도가 생겼는데, 이거 없어져야 한다. 한 순간의 실수 때문에 20~30년간 열심히 일해 온 사람들이 후선배치 되는 경우는 없어야 한다. 제가 좋아하던 선배도 한 번 실수로 후선배치돼 배회하고 있다. 지켜보고 있으면 너무 안타깝다.

사회 : 분위기가 너무 무겁다. 근데 프랑스어 전공하셨나? 보통 ‘펀드’라고 하는데 ‘뻔드’라고 발음을 한다.

조광휘 : 아, 경상도 사투리다. 뻔드~(일동 박장대소)

최경순 : 자의반 타의반으로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전환되면서 서러움이 많았다. 약자 위치에 서면 별거 아닌 것도 더 서럽게 느껴지는 법이다. 콜센터에서 일하는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다. 경험이 많기 때문에 직원들에게 조언을 많이 한다. 최근 입사한 정규직들은 2~3개월 교육받고 바로 창구에서 일을 한다. 때문에 실수가 많다. 손님들은 우리한테 항의한다.

민원 때문에 당사자들에게 전화를 걸면 막무가내다. 아무리 직군이 달라도 대선배인데 섭섭할 때가 많다. 특히 직급은 높지만 동기나 후배들이 그럴 때면 더 그렇다.

윤우석 : 대학생활 이후로 별로 괴롭다는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그런데 최근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운 사람이 생겼다. 자기가 살아남기 위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이 높은 위치에 있으면 피해가 막심하다. 가끔 ‘뒷골목에서 보자’는 생각을 하곤 한다.(일동 공감하는 듯 박장대소)

김경중(41) 국민은행 여신관리지원센터 차장
사람보단 성과가 중요한 세상


사회 : 옛날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을 것 같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행복했거나 기뻤던 순간들을 얘기해 보자.

최경순 : 은행에서 나를 가장 필요로 했던 시기가 가장 행복했던 시기였다. 예전에는 행원을 대상으로 서비스 경연대회를 열곤 했다. 한 번은 금상을 탄 적이 있는데, 포상으로 나와 팀원들은 물론 팀장과 차장까지 모두 해외여행을 다녀왔다. 그때만 해도 은행에 이런 프로그램이 많았다. 또한 1년에 한 번은 본점과 지방지점 직원들이 모두 모이는 자리가 있었다. 그럴 때면 본점이 들썩거린다. 그때가 그립다. 지금 은행원들은 너무 불쌍하다. 술 한잔 할 때도 주요 화제가 실적이다. 순이익이 몇천만원 떨어졌느니 오늘 실적이 어땠느니 난리가 아니다. 사람이 아니라 실적 기계일 뿐이다. 옛날이 훨씬 행복하고 보람됐던 것 같다.

조광휘 :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주판 잘 하는 사람이 최고였는데, 전자계산기 들고 출근해 외계인 취급을 받았다. 6개월 동안 보조역할만 했다. 참다 참다가 한 술자리에서 사수에게 “그래도 명색이 장교출신인데 보조역할만 시키냐”고 대들었다. 그랬더니 가계당좌 업무를 맡겨줬다. 특히 사수·부사수제 하에서 일 배울 때가 좋았다. 신입이 들어오면 저마다 ‘어떻게 내 부사수를 만들어볼까’ 궁리하는 게 일이고 재미였다. 여직원들이 들어오면 더 좋아했다. 입사 당시 나는 사수를 잘 만났다. 서로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외환위기 이후로는 사수·부사수 제도가 없어졌다. 자기 일이 바쁘니까 신입행원이 들어와도 가르쳐 줄 여유가 없다. 실수도 많다. 고객은 바로 우리에게 월급을 주는 분들이다. 고객이 불편을 느끼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사수·부사수제도가 있어야 한다. 서로 지원하고 일을 대신 맡아줄 사람이 필요하다. 지금은 고객을 모실만한 여유가 없다.

김경중 : 경력을 인정받을 때가 제일 행복하다. 외환위기 이후 나이든 사람들이 천대받고 있지만, 그들은 두뇌회전이 잘 안될지는 몰라도 경험이 많아 신중하고 큰 실수가 적다. 그런데 외국자본의 경우 그런 부분을 활용하지 못한다. 안타깝다. 장기투자도 없고 비전도 없다. 직원들도 실적만 따지다 보니 정이 메말라 간다. 예전에는 개인적 어려움이 있으면 함께 했는데, 지금은 경쟁상대로만 본다.

윤우석(34) 제일화재해상보험 신채널사업본부 채널영업 1팀 대리
‘기쁜 이야기를 해도 슬픈 이야기로 끝나는’


이영 : 신입사원 시절에 사내연애를 했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사내커플이 구조조정 1순위다. 98년 4월에 결혼했는데, 결혼한 지 2~3개월 후에 아내가 직장을 그만뒀다. 노조활동을 할 때인데, 내가 ‘네가 그만두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그만둬야 한다’고 말했다. 본인은 물론 싫어했다. 구조조정이 마무리되고 나서 사내결혼 커플을 찾기 힘들어졌다.

이병무 : 학교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오면서 나의 능력을 펼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 때가 가장 행복했다. 물론 IMF 이후로는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로 위안을 삼고 있지만. 나도 사내결혼을 했는데 희망퇴직 1순위였기 때문에 몰래 연애했다. 희망퇴직 끝나고 나서 결혼했다. 그런데도 결국 아내가 그만두고 계약직으로 일하게 됐다. 2년 전에야 시험을 치르고 다시 정규직으로 재입사했다. 아내한테 계약직들을 채근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혹시 그들의 업무능률이 떨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은 능력의 문제가 이나 고용형태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조광휘 : 근데 왜 기쁜 이야기를 하라고 했는데, 자꾸 슬픈 이야기만 하냐.(일동 폭소)

이 영 : (농담조로) 결혼한 뒤 상경했는데, 우리 부부를 연결시켜준 지점장이 있다. 나중에 구조조정까지 했지만. 정말 원망 많이 했다.

최경순 : (맞장구치며) 나도 직장 그만두게 됐을 때, 남편과 한 달 동안 말도 안하고 지냈다.

윤우석 : 회사에서 맺는 인간관계가 진정한 기쁨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수가 있었는데, 관계가 무척 돈독했다. 회사가 99년부터 매년 구조조정을 하는 바람에 그 형도 2002년에 퇴사했다. 굉장히 허전했다. 조직개편하고 팀도 없어지고, 구조조정은 계속되고. 지금도 친한 선・후배가 있긴 하지만, 그 형 같지는 않다. 그때는 형이 먼저 죽으면 그 자식을 내가 키워야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지금은 회사가 그런 마음의 여유를 주지 않는다.

이영 : 요즘엔 내가 10이 있으면 5라도 주고 싶은 사람들이 없다. 인수합병 이후로 회사는 노동자들을 각 출신별로 구분해 관리를 한다. 그럴수록 이질감만 더 커진다. 예전에는 회사가 작았어도 집단문화가 있었는데, 지금은 철저하게 개인화・개별화돼 있는 것 같다.

조광휘 : 사실 인수합병을 원해서 했겠는가. 금융감독원과 재경부에서 하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국민은행과 주택은행 합병하라고 했을 때 끝까지 반대했다. 관치금융이 우리를 궁지로 몰았다. 은행 간 인수합병이 IMF와의 이면계약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IMF의 가장 큰 피해자는 은행원들이다.

김경중 : 맞다. 외국자본이 들어와서 은행을 먹으려고 하는데, 당시 지방은행까지 수십 개였다. 그걸 어떻게 하나씩 먹나. 그래서 정부가 먹잇감으로 잘 포장하기 위해 동원한 방법이 인수합병이다. 이제는 증권사이나 보험사까지 확산되고 있다. 국민은행이 증권회사를 인수하려고 할 때 ‘국민은행이 증권회사를 하려면 5천억원 정도는 해야 증권시장에 기여하지 1~2천억원 갖고 되겠냐’는 말이 나돌았다. 그래서 국민은행이 규모가 작은 증권회사 인수를 포기했다는 풍문도 있다.

이영(38) 하나대투증권 연금사업부 컨설팅팀장
금융노동자들의 미래는


사회자 : 한미-FTA는 은행이, 한EU-FTA는 증권사가 많은 피해를 입을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이제는 업종의 구분도 없어져서 금융권 전체가 경쟁자가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윤우석 : FTA나 자통법이 나에게까지 어떻게 다가올지 아직 감은 안 온다. 좋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한 예상만 있다. 어쨌든 IMF 이후로 금융노동자들의 목숨은 이미 내놓은 상태다. 회사를 오래 다니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다. 보험회사뿐만 아니라 금융권에서 일하던 사람들은 자신이 근무하던 것은 살려서 이후를 도모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 생각을 하면 답답하다. 떠나는 시기를 40대로 잡으면 지금부터 준비해야 하는데, 노후까지 살아갈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기 쉽지 않다. 막막하다.

이병무 : FTA와 자통법은 자본시장을 세계화하는 것이다. 경쟁력 없는 자본은 도태되고 론스타와 같은 자본이나 더 큰 자본들이 자유롭게 들어왔다 빠져나갈 수 있는 틀을 만드는 거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국민의 정서·문화와는 상관없이 기업의 질서와 문화를 바꾸고 있다. 그런 구조 속에선 개인이 열심히 일하고 안하고, 그런 것들이 소용이 없다. 그런 미래가 온다는 것이 안타깝다. 물론 꿈은 있다. 10년 후에 회사의 의사결정권을 가질 수 있는 위치까지 가겠다는 것이다. 인생에서 무언가 결정을 할 때가 온다면 바로 그때쯤이 아닐까 생각한다.(일동 박수)

이병무(37) 신한생명 상품개발부 과장
사회 : CEO, CFO가 되겠다는 것이냐? 되면 여기 있는 사람들 좀 고용해 달라.

이병무 : (웃으며) 자본은 자본일 뿐이다.

조광휘 : 맞다. 자본은 자본의 흐름대로 흐를 뿐이다.

김경중 : ‘은행 수수료 적게 내는 방법’ 그런 제목의 책을 내고 싶다. ‘세금 적게 내는 방법’이라는 책이 나와서 대박을 터트렸는데, 그것에서 착안한 것이다. 그 책 출판사 사장이 대학 후배다.(일동 웃음)

조광휘 : 우리의 미래는 사실 없다. 내 옆에서 일하던 사람들도 다 떠나갔다. 가끔 사람들이 집이 어디냐고 물어보면 서울역이라고 한다. 노숙자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근데 노숙자도 자기 스케줄이 있다. 어디가면 밥 주고, 어디가면 돈 주고. 순서에 따라 움직인다. 또 절대 혼자 움직이지 않는다. 항상 팀을 이뤄 함께 행동한다.

최경순 : 미래를 대비해서 파악한 것이냐. 은행일도 바쁘다면서.

조광휘 : 내가 실제로 서울역 옆에 산다.(일동 웃음) IMF 때 국민들이 금반지 팔았듯, 지금은 적립식 펀드로 나라를 구하고 있다. 외국인들이 자꾸 떠나는데, 펀드가 그것을 다 흡수하고 있다. 국민들이 애국자다. 예전에는 영토전쟁이었지만, 지금은 자본전쟁이다. 최전방에서 싸우는 사람들이 바로 여기 모이신 분들이다. 특히 외국자본을 견제할 수 있는 건 정부도, 금융감독위원회도 아닌 바로 노동조합밖에 없다. 은행은 판매를 하고 증권이나 보험사가 운영을 한다. 서로 상생의 역할을 하고 있다.

이영 : 그러면 더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 아니냐.

조광휘 :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이 자리에 모인 것 아니냐. 이제 은행은 껍데기만 남았다. 우리는 상품을 팔고, 돈은 증권사나 보험사로 흐른다. 그것을 잘 이용해서 각 회사가 수익을 내야 한다. 우리가 따로 국밥이 아니라 유기적이고 상생할 수 있는 구조로 가야 한다.

사회 : 오늘의 만남의 결론을 지어주시는 것 같다.

최경순 : 정규직을 전환된 후 같이 근무하던 사람들끼리 ‘정년이 몇 살이지’라는 말을 하곤 한다. 여자로서 정년 운운하는 것이 분위기와는 맞진 않지만, 나도 정년까지 10년 남았다. 우리 팀에서 가장 나이 많은 언니가 54세다. 최초로 정년까지 일하는 사람이 나올 수 있을까, 직원들은 다 그 언니만 바라보고 있다. 한편에선 두려움도 있다. 월급이 많아지고 처우개선이 이뤄질수록, 반드시 이후에 구조조정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당장 월급에 변화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복지는 좋아지고 있다. 희망사항은 승급은 없더라도, 정년까지 일했으면 하는 것이다.

 
<대담 후기>
‘술자리 톡톡톡!’은“건강이 제일 중요하니까 챙기고 살자”는 최경순씨의 건배제의와 함께 마무리됐다. 술이 과했던 것은 아니지만, 6명의 금융노동자들은 분위기에 젖어들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술자리 내내“맞다, 맞다”라며 서로 맞장구를 치곤했다. 세상은 변하고 있고, 그 변화는 적어도 금융권에 있는 노동자라면 누구에
게나 비슷한 양상으로 다가오고 있다. 그 안에서 각자가 감내해야 했던 고통들, 잃어버린 것들, 품고 있는 꿈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짧은 시간이나마, 직장에선 오래 전에 없어진‘사람 냄새’를 맡았기 때문일까. 서로 처음 본 사람들이었지만,“ 우려했는데, 막상 와보니 편안했다”, “정기적으로 모임을 만들자”라는 얘기들이 스
스럼없이 흘러나왔다. 술자리가 끝난 후 금융노동자들은 인사동 좁은 골목을 걸어걸어 새로운 술집을 찾아 나섰다. 아직 마음속에 남아 있는 온기를, 너무 일찍 떨쳐버리고 싶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남녀관계라는 게 본능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 자연스러움마저도 바꿔버린 게 외환위기 이후의 구조조정이다.” 그랬다.‘ 술자리 톡톡톡!’에 참석했던 금융노동자들은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분위기를 원했다. 외환위기 이전만 해도 금융회사들은 사내결혼을 장려했다. 일 때문에 바쁘니까 밖에 나가서 연애하지 말고 사내에서 하라는 뜻이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상황이 역전됐다. 이영씨는“사내커플의 또 다른 이름은‘구조조정 확률 100%’”라고 안타까워했다.


<매일노동뉴스> 2007년 8월 2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