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
2006-03-14 변정희 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살림’ 상담원
눈 위의 발자국
밖을 나오니 부산에도 어느덧 눈부신 눈송이들이 쏟아져 내린다. 글쓰기 교실을 시작하면서, 언니들은 그 글 속에 어떤 표정을 보여줄 것인지? 눈 속을 힘겹게 걸으며 헤쳐 나가듯, 그이들의 발자국이 선명하게 꾹꾹 찍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날 부산에는 101년 만에 큰 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성매매피해여성 글쓰기 프로젝트. 이것이 우리가 시작한 글쓰기 교실의 긴 이름이다. 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살림’의 신참내기 상담원이었던 나는, 대학 때 교지 몇번 만들어 본 경력으로 글쓰기 프로젝트 보조 진행자로 참여했다. 글쓰기 교실의 주인공은, 성매매업소를 나와서 쉼터에서 지내는 열 명의 탈성매매 여성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언니’라 부른다. 그이들이 우리와 다르지 않다는 뜻과 세상에 상처 받은 몸을 다정다감하게 어루만지고 싶은 소망을 담은 호칭이다.
열 명의 언니들은 모두 열일곱번의 글쓰기 시간에 참여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고스란히 풀어냈다. 언니들 이야기는 그 어떤 색깔로도 한꺼번에 표현할 수 없는 무지개처럼 모두 다르다. 아버지의 무시무시한 폭력으로 열세살에 집을 뛰쳐나온 언니, 새어머니의 학대로 겨우 아홉살에 가출을 처음 했던 언니, 선생의 차별로 중학교를 자퇴한 언니, 음악을 하는 것이 꿈이었던 언니. 때로는 눈물의 여왕들처럼 울먹였고, 때로는 웃음보가 터져서 어쩔줄 몰라 하였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에 내뱉은 일이 한번도 없었던 언니들이, 자신들만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것이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글씨는 삐뚤빼뚤, 가볍던 연필이 그리도 무겁게 느껴지는지 연필 끝이 술술 나가지 않아 끙끙대던 언니들. 그러나 어린 시절의 간간한 추억들과, 먼저 세상을 떠난 가족의 이야기를 종이 위에 써내려갈 때마다 눈시울이 시큰하게 붉어지던 언니들. 그리고 우연히 유흥업소에 발을 내딛게 된 이야기, 겨우 업소를 탈출한 순간들. 아직까지는 사람들의 눈들이 힘겹고, 아직까지는 세상에게 당당히 외칠 용기가 없었던 탈업소 뒤의 많은 시간들. 언니들은 그렇게 종이 위에 연필을 얹어 자신의 상처를 말하고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조금씩 마음을 열어갔다.
글씨가 엉망이었어도, 문장의 앞뒤가 맞지 않았어도, 언니의 글에는 모진 삶을 살아왔던 강한 울림이 느껴졌다. 글쓰기 시간을 거쳐 수기집이 나오기까지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세상에 빛을 본 수기집 <너희는 봄을 사지만 우리는 겨울을 판다!>의 제목은 그동안 언니들을 ‘매춘여성’이라 낙인 찍어 온 세상에 대한 따끔한 일침이었다. 실제로 업소에서 언니들이 보낸 시간은 혹독한 겨울이었기 때문이다.
이제, 겨울이 지나고
갓 나온 따끈따끈한 수기집을 받아 든 언니들은 매우 감격스러워했다. 순전히 자신의 힘으로 써내려간 한 편의 글이 엮이고 엮여 책으로 나왔다는 사실이 신기한 것 같았다. 이 한 권의 책은 언니들의 삶을 낱낱이 기록한,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거울이었다.
글쓰기 시간에 참여했던 언니들 가운데 벌써 네 명이 당당히 대학에 합격해, 꿈을 이루기 위해 한 발자국씩 나아가고 있다. 나머지 언니들도 요리사로, 네일아티스트로 자신의 꿈을 하나씩 만들어가고 있다. 그렇게 언니들은 삶 앞에 펼쳐진, 아직은 가느다란 희망의 길을 조금씩 넓혀가고 있다. 아마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만큼이나 더욱 무시무시한 시련이 언니들에게 닥치는 날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과거와 힘겹게, 그러나 당당히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얻은 언니들은, 아마 그 다음 미래도 잘 살아나갈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그나저나, 수기집을 통해 언니들이 정말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을까? 나보다는 아무래도 언니의 목소리로 직접 말하는 게 더 나을 거다.
“만약에 주위에 탈성매매 여성이 있다면 정말 따뜻한 손으로 잡아주는 게 정말 엄청난 힘이 되니까…(중략)… 회피하지 말고 손만이라도 잡아줬으면 좋겠고. 또, 우리가 아무리 그런 직업을 가졌던 여성이라 해도 똑같은 여성이라고 생각해줬음 좋겠어요. 자기들은 깨끗하고 우리는 더럽다는 생각을 버렸음 좋겠어요. 우린 절대 더러운 몸이 아니고 어떻게 하다 보니까 그런 길로 빠진 것뿐이지 마음만은 정말 순수하다는 거…(후략)….”
- <수기집>에서 샤인의 글
성매매피해여성지원센터 ‘살림’
www.wom-survivors.org
051-247-82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