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장으로는 돌아갔지만…”
<신년기획 르뽀-장기투쟁사업장을 찾아> 3회-118일만에 단협 체결, 그러나 본격적 노조탄압 전쟁 시작되다
2006-01-05 김미영 기자
거대한 회사와 맞서야 하는 신생노조가 ‘살아남기 위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다. 회사에 협력하거나 인정받을 때까지 죽도록 싸우거나….
화섬노조 KCC아산지회는 지금 후자의 길을 걷고 있다. 물론 전자의 길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 KCC아산지회 사람들은 ‘맞서면 맞설수록 이 회사가 얼마나 거대한가를 느끼게 된다’고 털어놓았다.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하더라도 회사를 향해 머리를 치켜드는 ‘노조’라는 존재는 결코 있을 수 없다는 회사의 입장이 온몸으로 느껴지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간 공장,
그러나 커져가는 ‘불안’
구랍 29일 KCC 아산공장을 찾았을 때는 마침 파업 이후 43명의 업무 미부여자(자택대기 상태) 가운데 9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공장으로 출근한 날이었다. 하지만 출근했던 조합원들은 주간업무가 끝나는 오후4시가 되자 다시 천막농성장으로 옹기종기 모여들었다.
“난 오늘 바닥청소 했어. 넌 뭐했냐?”
“잡초 제거.”
다시 공장에 돌아갔지만 파업 이전에 자신이 서 있던 라인으로 돌아간 이는 단 1명이다. 기계나 전기파트를 담당하던 공무부서 사람들은 생산부서에 배치됐고, 10여년 전에 강원도에 살았다는 이유로 경기 여주공장이나 강원 문막공장으로 전환배치가 검토되고 있는 이도 있었다.
비조합원들에겐 때때로 야근도 주어졌지만 조합원들은 철저히 시간외근로에서 배제되고 있었다. 주간업무조차 ‘바닥청소’, ‘잡초제거’ 등 잡일로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한다. 파업이 끝난 이후 조합원들은 공장안에서 철저히 분산된 채 하루하루를 ‘고용불안’과 싸우고 있었다.
“철저히 분리하라 그리고 갈등을 유발하라”
회사의 치밀한 심리전
KCC아산지회는 지난해 3월20일 화섬노조에 가입한 후 그 해 6월15일부터 약 3개월여 간의 파업을 거쳤다. 10월10일 일단 단협 체결에는 성공했지만 아직까지도 ‘노동조합 사무실’ 현판을 걸지 못한 채 천막농성장 생활을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KCC 아산공장 노동자들이 오랜 기간 천막농성을 접지 못하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KCC아산지회는 “회사가 고도의 심리전을 통해 조합원들을 철저히 분리하고 갈등을 유발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KCC아산지회가 밝힌 ‘회사쪽이 노조를 뿌리째 흔들기 위해 동원하는 방식’은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된다.
첫번째는 노노 사이의 갈등 유발이다. 지난 3월 당시 전체 직원 140여명 가운데 95명이 노조에 가입했으나 현재 노조는 ‘과반수’에도 못 미치고 있다. 대신 비조합원들로 구성된 ‘KCC아산공장 비상대책위원회’가 80여명까지 불어난 상황이다. ‘KCC아산공장 비대위’는 사실상 회사쪽에서 직접 개입하고 있다는 의혹이 회사 관리자의 수첩을 통해 드러난 바 있다.<본지 2005년 8월10일자 참조>
당시 노조가 우연히 습득한 회사 관리자의 수첩에는 ‘KCC는 ‘비조합원 50% 이상을 확보하면 비대위를 구성하고, 2/3를 확보하면 지도부를 탄핵한다’는 계획이 굵은 글씨로 적혀 있었으며, 비대위를 구성한 목적과 관련해서도 (2005년) 6월14일자로 △현안문제 회사와 협의 △조합 무력화라고 기록돼 있으며, ‘구조조정 →비대위와 충실한 협의 후 시행’이라고 명시돼 있었다.
실제로 ‘KCC아산공장 비대위’는 KCC아산지회가 파업에 돌입한 직후인 6월17일 구성됐다. 또한 구성 직후 회사쪽과 교섭을 진행, 임금협상을 비롯해 희망퇴직, 전환배치 등 고용조정 문제까지도 협상했다. 특히 KCC아산공장 비대위는 ‘함께 가자 우리 한마당으로’라는 명의의 '괴문서'를 1주일에 2~3차례 조합원의 각 가정으로 배달한다. 내용은 주로 노조지도부와 합법적인 노조활동에 대한 비난과 함께 내부분열을 유도하는 글이다.
KCC천막농성장을 찾았을 때 한 조합원이 자신의 집 우체통에서 방금 꺼내왔다며 보여준 이 문서는 발신자도 적히지 않은 흰 편지봉투 속에 들어있었다. “제2, 제3의 별도 항복서에 합의한 멍회장님(정몽진 KCC 사장을 빗댄 말)의 결단은 박수 받을 고뇌에 찬 결정”으로 시작하는 이 문서는 KCC아산지회를 온통 비방하는 내용으로 가득차 있었다. “요즘엔 열기 쉽게 봉투에 풀칠도 안한 채 보내더라구요. 2~3일에 한통 꼴로 집으로 오는데 아이들이 볼까 무섭습니다.” 편지를 보여준 조합원의 말이다.
KCC아산지회는 이 괴문서에 대해 ‘조합원들을 분열시키고 매우 혼란스럽게 하는 ‘골치덩어리’라고 지칭했다. 이 괴문서 역시 위에서 지적한 회사 관리자의 수첩에 ‘집행부와 연맹, 조합원 간의 갈등을 유발할 수 있는 이슈를 개발, 지속적인 필요’라는 문구와 함께 ‘노조 집행부 주장의 허구성을 담은 홍보물(유인물) 내용 좋다’라는 표현이 있어 회사쪽이 직접적으로 개입한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이밖에도 공장 안에서도 비조합원들과 조합원들 간의 크고 작은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고 KCC아산지회는 설명했다.
그리고 두번째는 조합원들을 철저히 분리시키는 방식. KCC아산지회 간부의 말을 들어보자.
“파업 이후 업무복귀 과정에서 회사가 파업참가자 70명 중에서 43명에 대해서 ‘자택대기’를 하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왜 ‘대기발령’ 시키냐고 물었더니 ‘대기발령’이 아닌 ‘업무 미부여’라고 설명하더라구요. ‘대기발령’은 징계에 해당한다나? 아무튼 다른 회사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으니, 로비 출근투쟁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업무부여’가 단계적으로 시행된 부분입니다. 회사에서 조합원들에게 개별적으로 ‘0월0일까지 회의실로 오라’고 전화를 했더라구요. 이 과정에서 조합원들이 크게 술렁였어요. 아직까지도 9명은 업무 미부여자입니다”
이 간부는 “단계적 업무복귀는 조합원들이 현 상황에 대한 공감대를 무너뜨리는데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세번째는 노조 내부의 갈등을 유발하는 방식이다. KCC아산지회에 따르면 현재 회사쪽에서 일부가 파업 사태 등에 대해 책임질 경우(퇴직할 경우) 이번 노사갈등 국면을 일단락시킬 수 있다고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사는 정리해고 실시 등 지속적인 구조조정 압박을 통해 조합원들을 통제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회사쪽은 정리해고를 위한 협의요청을 노조에 통보한 바 있다. 박영일 KCC아산지회장은 “지금도 회사가 철저히 조합원들만을 대상으로 희망퇴직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박영일 지회장은 “노동부쪽에서도 이런 회사는 처음 봤다고 혀를 내둘렀다”고 덧붙였다.
사쪽 “노사갈등 원인은 구조조정”
“노조가 구조조정 회피한 채 전임자 인정만 요구해”
이와 관련해 KCC아산 임덕수 관리부장은 “노사갈등의 원인은 장판업계의 불황에 따른 구조조정”이라고 반박했다. 임 관리부장은 “현재 회사가 2,500억원의 누적적자가 있으며, 아산공장의 경우 70명의 잉여인력을 해소하지 않으면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구조조정을 협의해야 할 노조가 전임자 인정만 요구하면서 파업을 벌여서 사태가 지금까지 왔다”는 게 임 관리부장의 주장이다. 또한 “현장에 복귀에도 할 일이 없기 때문에 자택대기를 시킬 수밖에 없었으며, KCC아산공장 비대위에 대해서도 근로자 과반수이상을 대표하기 때문에 고용문제 등을 협상해온 것”이라고 밝혔다.
임덕수 관리부장은 현재 KCC 본사 생산관리부장이다. 아산공장에 지회가 설립되자 본사에서 교섭권을 위임받아 파견됐다. 화섬노조에 따르면 그는 유명한 ‘KCC의 노무관리 전문가’다. KCC 울산공장에서도 쟁의행위가 벌어졌을 때는 울산공장으로 파견되기도 했다.
KCC는 지난해 6월 반기 총자본금 1조9,213억9,700만원, 매출총이익 2,309억5,800만원을 기록했다. 이 거대한 회사는 평범한 노동자가 올해 결혼생활 12년만에 처음 이룬 ‘내 집 장만’의 꿈을 단지 ‘조합원’이라는 이유로 파괴할지도 모른다. KCC아산지회 천막에서 만난 한 조합원은 “올해 드디어 내가 장만한 아파트에 입주할 예정”이라고 자랑했지만, 그는 그날 아침 회사 관리자로부터 “강원도 문막공장이나 경기 여주공장 중 어느 곳이 일하기 좋겠냐”는 말을 들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