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로사회’ 한국, 지금 필요한 것은 ‘회복할 권리’

“노동시간 규제 넘어서 회복 중심 산업보건 정책으로 전환해야”

2025-12-04     김미영 기자
▲ 자료사진 클립아트코리아

초장시간 국가인 한국은 오랫동안 노동시간을 줄이기 위한 논의를 해 왔다. 그런데 노동이 끝난 뒤, 우리는 제대로 회복하고 있을까. 수면은 충분한지, 노동의 피로가 다음 날로 이어지고 있지는 않은지, 일상의 리듬은 지켜지고 있는지 야간·교대·플랫폼 노동이 일상이 된 지금, 질문을 바꿀 필요가 있다.

‘회복할 권리’는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단순한 휴식이 아니다. 신체·정신·감정적 부담으로부터 다시 정상 상태로 돌아갈 권리, 즉 개인이 다음 노동일을 건강하게 맞을 수 있도록 보장받아야 하는 권리를 의미한다.

노동자의 건강·업무성과 결정하는 핵심 변수 ‘회복’

최근 20년 사이 ‘회복’이라는 개념은 산업보건·심리학 분야에서 중요한 연구주제로 손꼽힌다. 자비네 존엔타크(Sabine Sonnentag) 독일 만하임대학교 교수(심리학)는 회복을 “노동자의 건강, 안전, 그리고 업무성과를 결정하는 핵심 변수”라고 강조한다. ‘회복’이 단순히 휴식이나 복지 차원의 혜택이 아니라, 노동을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생물학적·심리적 기반이라는 뜻이다.

그렇다면 연구자들이 말하는 ‘회복’은 무엇일까. 회복(recovery)은 스트레스나 노동 요구 때문에 높아진 신체적·심리적 긴장 상태가 다시 노동 이전의 정상 수준으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정의된다. 회복에는 심리적 거리두기·이완·숙련감·통제감 등 네 요소가 필요하다. 퇴근 뒤 업무에서 정신적으로 벗어나고, 신경계의 긴장을 실제로 낮추는 이완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회복이 시작된다. 여기에 업무와 다른 영역에서 성취를 느끼는 경험과, 퇴근 후 시간을 스스로 선택한다고 느끼는 통제감이 더해지면 회복 효과는 커진다. 단순히 쉬는 시간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쉬었는가가 노동자의 다음 날을 결정짓는다는 의미다. <상자기사 참조>

유럽은 회복할 권리 법으로 보장, 한국은?

유럽연합(EU)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이런 관점을 제도화했다. 근로시간 지침은 연속 11시간 휴식과 주 24시간 연속 휴식, 주당 최대 노동시간, 야간노동 상한을 규정한다. 독일은 헌법과 법률로 일요일 영업을 제한하고, 직업의학 가이드라인을 통해 연속 야간근무 2~3일, 충분한 회복시간을 권고한다. 프랑스 노동법은 한발 더 나아가 “야간근로는 예외적으로만 허용되며, 근로자의 건강·안전과 사회적 이익에 의해 정당화되어야 한다”고 못 박는다. 쉬는 시간은 남는 시간이 아니라, 보장받아야 할 권리라는 인식이 새겨져 있다.

반면 한국에서 야간·주말·새벽노동은 “노동자의 선택”이라는 말로 정당화된다. 근로기준법 56조에는 야간노동을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 수행하는 노동으로 정의하고 있지만 야간노동자에 대한 명확한 정의 규정은 없다. 그래서 관련 통계조차 없다. 다만 안전보건공단이 실시하는 근로환경조사를 통해 추론할 수 있다. 2023년 7차 근로환경조사(KWCS)에 따르면 ‘밤 10시~새벽 5시 사이 최소 2시간 이상 일하는’ 야간근무 수행 비율은 6.6%를 기록했다. 2006년 20.4%에서 지속적으로 감소해 역대 가장 낮은 수준이다. 교대근로 비율도 6.9%로 나타나 이전 조사보다 더 줄었다. 반면 주말노동은 여전히 높다. 토요일 근무 경험률은 34.7%, 일요일 근무 경험률은 13.9%로, 불규칙 노동의 상당 부분이 주말에 집중돼 있다.

야간근무 자체는 감소했지만, 심야노동에 의지해 성장하는 업종, 이를테면 물류·서비스·돌봄 등에서는 여전히 회복을 방해하는 근무패턴이 강하게 유지된다. 특히 토요일 근무율이 3명 중 1명꼴인 현실은 ‘공식적인 주말휴식’이 실제로는 노동자 다수에게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을 보여준다.

피로한 사람일수록 쉴 권리 없는 회복의 패러독스

특히 저임금·불안정 고용이 집중된 업종일수록 생계 때문에 주말·야간노동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반복되고, IT·물류·플랫폼 업종에서는 심야작업이 업무 구조 자체에 내재된다. 존엔타크 교수는 이러한 상황을 ‘회복의 악순환(recovery paradox)’이라고 설명한다. 피로가 누적될수록 회복이 더 필요하지만, 피로한 사람일수록 회복경험(충분한 수면·심리적 거리두기·이완 활동)을 수행할 여력은 더 줄어든다는 역설적 구조다. 교대제·야간노동 종사자는 생체리듬이 교란돼 회복 요구가 가장 크지만, 정작 회복 시간을 확보하기 가장 어려운 집단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한국의 비표준 노동시간 구조는 노동시간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회복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노동환경이라는 점에서 심각하다. 노동시간 규제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회복이 차단된 상태에서 반복되는 야간·주말 노동은 만성피로, 수면장애, 사고 위험 상승, 우울·불안, 심혈관질환 등으로 이어지고, 결과적으로 노동자의 건강과 안전, 업무 능력까지 모두 잠식한다. ‘회복할 권리’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야 한다는 논의가 필요한 이유다.

야간노동 줄어도 피로는 남는다
회복권이 빠진 한국의 구조적 피로

강모열 서울성모병원 직업환경의학과 교수는 건강한 회복을 위해 연속 야간근무를 2~3일 이하, 근무 후 24시간 회복, 교대 간 최소 11시간 휴식, 주 1회 24시간 이상 연속 휴식을 권고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노동관련법에서 ‘회복할 권리’는 공백 상태다. 주 52시간(연장근로 12시간 포함) 상한제처럼 그동안 노동정책이 시간의 총량 규제에만 매달려 있었던 탓이다. 실제 피로는 야간근무를 비롯해 불규칙 스케줄, 교대제, 플랫폼 호출, 감정노동, 업무 외 디지털 연결 같은 비표준화된 노동의 형태에서 더 많이 발생한다. ‘불규칙한 근무’는 과로사·과로성 뇌심혈관질환 업무상질병 판정에서 명확한 가중요인으로 인정된다. 전문가들은 “산업안전보건 정책의 초점을 “몇 시간을 일했나”가 아니라 “얼마나 회복할 수 있는가”로 전환해야 한다”고 말한다. 퇴근 후 연속 휴식권, 불규칙 스케줄 보호장치, 교대제 가이드라인(연속 야간 2~3일, 교대 간 11시간 휴식) 같은 회복시간 중심의 제도가 필요하다. 업무지시·메신저 호출을 차단하는 디지털 연결 차단권도 검토해야 한다. 야간노동은 세계보건기구(WHO)가 잠재적 발암요인으로 분류할 만큼 위험한 만큼, 단순 수당 문제가 아니라 산업안전의 핵심 영역으로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다.

회복할 권리는 여유나 사치가 아니다. 노동자가 다음 날 다시 일할 수 있게 하는 생물학적 조건이다.

[참고한 논문]
Sonnentag, S., Cheng, B. H., & Parker, S. L. ‘Recovery from work: Advancing the field toward the future’

회복의 조건

회복을 이루는 핵심 경험은 네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는 심리적 거리두기(detachment)다. 퇴근 후에도 머릿속에서 일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몸은 멈췄어도 마음은 계속 ‘근무 중’인 셈이다. 심리적 거리두기가 다음날 피로감과 스트레스 반응을 낮추고 집중력을 높이는 데 가장 중요하다.

둘째는 이완(relaxation)이다. 단순히 누워 있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감신경계의 긴장을 실제로 줄여 신체가 안정 상태로 내려가야 한다. 명상, 복식호흡, 가벼운 산책, 따뜻한 샤워처럼 신체적 각성을 낮추는 활동이 회복에 효과적이다.

셋째는 성취감(mastery)이다. 의외로 쉬는 것보다 새로운 능력을 배우거나 취미 활동을 하며 ‘성취’를 경험하는 것이 스트레스를 상쇄한다. 악기를 연주하고 운동을 하는 활동은 노동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자신감을 높이면서, 정서적 에너지를 채워 넣는 회복 경로가 된다.

넷째는 통제감(control)이다. 퇴근 이후의 시간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는 감각이 회복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금 이걸 할지 말지 내가 결정한다”는 감정이 생기면, 같은 활동을 하더라도 훨씬 더 효과적으로 회복이 일어난다.

‘얼마나 쉬었는가’보다 중요한 것은 어떤 방식으로 회복을 경험했는가다. 이 네 가지 경험이 균형 있게 작동할 때 노동자는 다음 날 다시 일할 힘을 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