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노총, 경사노위 참여 무산되다 ③

2025-11-24     박태주
▲ 박태주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사회적 대화, 공공의제 둘러싼 사회적 투쟁의 불쏘시개

“대화와 투쟁을 병행하겠다”는 말은 흔하다. 흔한 만큼 별 의미는 없다. 아니, 잘못된 표현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대화와 투쟁은 무 자르듯 둘로 나눠지는 것도 아니고, 설사 그렇더라도 어깨를 나란히 할 만큼 동격도 아니다. 투쟁은 대화의 한 부분이다. 굳이 대화와 투쟁을 나눈다면 투쟁은 대화를 관철하기 위한 수단적 행위랄까, 대화에 종속된다.

대화와 투쟁의 관계는 단체교섭에서 잘 드러난다. 교섭이 결렬되면 쟁의가 발생하고 파업에 들어가기도 한다. 파업이란 단체교섭에서 노조의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사용자를 압박하는 행위다. 파업이 교섭을 중단하는 것도 아니며, 교섭은 원칙적으로 대화를 통해 마무리된다. 단체행동권은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단체교섭권을 실현하고 노조의 교섭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이다. 교섭에서 노조의 단체행동권은 실행되지 않더라도 병풍처럼 교섭의 배경을 이루며 노조의 교섭력을 결정한다. 때로는 위협이 파업 자체보다 더 효과적이다. 단체교섭이 파업 없이 진행된다고 그것을 ‘투쟁이 거세된 대화’라고 보는 것은 얼마나 얼토당토않은 이분법인가.

쉽게 말해 투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대화의 일부이고 그 연장이다. 전쟁사가인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가 전쟁은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연속”이라고 말하는 방식을 빌어오면 그렇다. 그는 전쟁이 정치의 수단이자 정치의 연장이라고 말함으로써 전쟁이 본질적으로 정치 행위임을 밝힌다. 전쟁이 정치에 종속되듯 파업 역시 단체교섭의 목표와 논리에 종속된다. 이러한 논리 구조가 사회적 대화라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물론 사회적 대화에서는 단체교섭에 따르는 단체행동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회적 대화가 ‘투쟁이 거세된 대화’인 것은 아니다. 일상적인 대화가 고양이 발톱처럼 힘 관계를 감추고 있듯이 사회적 대화 역시 힘이 운동장의 기울기를 규정한다. 사회적 대화에서 노동조합의 단체행동권에 해당하는 것이 ‘갈등의 사회화’라고 할 수 있다. 노사 사이의 갈등을 사회의 공론장에 올림으로써 사적 갈등을 사회적 갈등으로 전환하며 확산하는 것을 말한다. 노동조합은 이 갈등을 중심으로 조직을 동원하고 전선을 사회적으로 확대한다. 단체교섭에 비해 훨씬 포괄적일 뿐 아니라 활용하기 나름으로 훨씬 강력한 수단이다.

이때 핵심은 다양한 갈등에서 우선순위를 매겨 이를 공공 의제(public issues)로 전환하는 능력이다. 의제를 선정한다는 것은 갈등의 우선순위를 매겨 사적 갈등을 공적 의제로 바꾸는 일이다. 의제 설정 권력을 ‘가시적인 권력의 두 번째 얼굴’이라고 부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앨렌 랜드모어, 2024. <열린 민주주의>. 첫째 가는 권력은 최종결정권이다). 이런 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노조의 투쟁력을 약화시키는 통로가 아니라, 투쟁을 발화시키는 불쏘시개가 된다. 사회적 대화는 그 자체로 투쟁의 형식이다.

사회적 대화, 정책 결정에 대한 노조의 참여

노조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는 가장 큰 목적은 이해당사자로서 정책 결정 과정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해당사자 민주주의, 보다 구체적으로는 ‘노동 있는 민주주의’의 실현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을 나눈다는 점(power-sharing)에서 그렇거니와 자기에게 영향을 미치는 결정 과정에 자신이 개입한다는 점에서도 그렇다.(로버트 달, 2011. <경제민주주의에 관하여>

노동자의 이해라는 실질적 정의는 노동자의 참가라는 절차적 정의를 통해 이뤄진다. ‘노동에 의한 민주주의’가 ‘노동을 위한 민주주의’로 건너가는 것이다. 특히 기업의 벽에 갇혀있는 우리나라의 노사관계에서 사회적 대화는 총연맹이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제도적 경로다.(사용자쪽의 정치 통로는 다양하다.) 이 과정을 통해 총연맹은 노동의 독점적인 대변인이자 사회적 주체(social actors)로서 자리 잡는다.

노조가 정책결정과 입법과정에 개입한다는 점에서 사회적 대화는 노동정치의 일환이다. 노동자정당이 취약한 한국의 정치 구조에서 총연맹의 사회적 대화 참여는 노동정치의 빈틈을 보완하는 기능을 한다.

항변도 존재한다. 그중에서도 사회적 대화, 특히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는 정부가 대화를 주도하면서 정부 정책에 대한 노동의 양보를 강요하는 수단이 됐다는 지적이 대표적이다. 이 지적에 대해선 몇 가지 사실을 말해야 한다. 먼저 경사노위의 의사결정은 다수제가 아닌 협의제에 바탕을 두고 있다. 즉 사회적 대화가 합의를 지향하더라도 합의를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것은 아니다. 노사 주체에게는 사실상의 거부권을 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경사노위가 출범하면서 민주노총의 제안을 수용한 결과다.

경사노위가 정부 주도로 흘러간다면 이의를 제기할 수 있고 정부가 합의를 강요한다면 이를 거부할 권한이 있다. 정부가 강요한다고 엄나무 가시방석에 앉을 일은 아니다. 민주노총은 사회적 대화의 주체로서 그럴 능력도, 배짱도 있다. 정부가 양보를 강요한다는 핑계로 경사노위에 불참하는 건 아무래도 민주노총이 제 얼굴에 침 뱉는 것으로만 보인다.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얻으려면 내가 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내줘야 한다.

불참의 이유는 딴 데 있을 수 있다. 사회적 대화는 정치적 교환을 바탕으로 삼는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일방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양보와 타협을 거쳐 합의에 이르는 과정이다. 이 경우 관건은 내부적으로 양보할 수 있는 능력(지도력)이다. 외부에서의 강요가 아니라 양보가 가져오는 내부 갈등이 두렵고, 그것이 사회적 대화를 도깨비 보듯 피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경사노위도 바뀌었다. 노사정위원회 시절을 관통했던 사회적 대화는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에 기반을 둔 경쟁적 코포라티즘’의 성격이 강했다. 경쟁력 제고의 수단으로서 사회적 대화가 ‘동원’됐으며 그것은 무엇보다도 노동 유연성 강화로 나타났다. 하지만 경사노위는 경쟁력 제고 대신 불평등 완화에 초점을 맞추는 ‘포용적 사회적 대화’로 방향을 틀었다. 노사정위원회에서 경제사회노동위원회로 이름까지 바꾸며 정체성의 변화를 꾀한 것이다. 계곡처럼 움푹 패인 오래된 불평등에 더해 그린·디지털 전환이 가져오는 노동시장의 불안정화·불평등 심화라는 도전에 직면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경사노위가 정부 주도적이라고 비판하면서도 민주노총은 각종 정부위원회에 참여해 왔다. 최근에는 노동부 내의 ‘노동시간 단축 로드맵 추진단’이나 국무총리실의 ‘발전산업 정의로운 전환 협의체’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들 위원회는 대놓고 정부가 주도할 뿐 아니라 노조한테 의제제안권이나 실질적인 거부권을 주지도 않는다. 사회적 대화에 대한, 그리고 정책개입에 대한 민주노총 내부의 열망을 반영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민주노총은 유독 경사노위에 대해서는 분명하게 선을 긋고 있다. 사회도 바뀌고 경사노위도 바뀌었지만 민주노총은 여전히 과거의 강물에 발을 담그고 있다는 게 나의 느낌이다. 과거의 강물에는 사회적 대화에 대한 피해의식과 정부와 사용자계급에 대한 구조적인 불신이 뗏목처럼 흐르고 있다.

결과적으로 2019년 1월, 정기대의원대회를 계기로 경사노위에 결합하려는 민주노총 지도부의 노력은 좌절됐다. 경사노위는, 그리고 민주노총은, 넘어진 자리에서 다시 넘어지고 만 셈이다. 사람은 때로 성공한 실험보다 실패한 실험에서 더 많이 배우곤 한다지만, 그래서 그림자도 삶의 한 부분이라지만, 거기까지였다. 당장 눈앞에 닥친 일은 ‘민주노총 없는 경사노위’를 꾸리는 일이었다. 그 시험대는 탄력근로제로 다가왔다.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