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시대 ‘노동정책 공공 의견수렴’ 재설계하자

박건영 메타보이스㈜ 대표

2025-11-24     박건영
▲ 박건영 메타보이스㈜ 대표

인공지능(Artificial Intelligence)이 상당 부분 인간노동을 대체할 것이라는 생각, 나아가서 인간이 궁극적으로는 소멸할 수도 있다는 견해가 최근 들어 급속하게 확산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이 AI를 앞세워 ‘데이터 기반 행정’과 ‘스마트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기도 하다. 효율과 속도는 향상됐지만, 정작 노동 현장의 목소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다. 정책 결정 과정에서 인간의 언어는 계산된 숫자와 조직화된 알고리즘에 압도되고, 인간노동자의 참여 통로는 더욱더 좁아진다.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대세인 AI 시대에서 노동정책은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여전히 세상의 중심인 인간의 참여와 숙의의 기술을 어떻게 재설계하느냐 하는 문제다.

자동화된 행정, 사라지는 노동의 목소리

노동현장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자동화되고 있다. 직·간접적으로 필수불가결하게 가속화되고 있는 생산현장뿐 아니라 일반 행정, 노사협의, 정책 집행까지 AI가 관여한다. 중앙 및 지방 정부는 데이터 기반 고용예측, 노동시장 분석, 디지털 전환 정책을 내세우지만 이 과정에서 노동자와 시민의 참여 과정은 점점 더 형식화되고 있다. 효율을 달성하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으나, AI가 통계와 보고서를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생상한 현장의 진실’을 충분히 담보하지는 않는다.

현장은 여전히 복잡하고 인간의 감정과 관계, 노동의 맥락이 녹아 있는 공간이다. 콕 짚어 언급하지 않더라도 기계적으로 대체하기 쉽지 않을 부분이다. 기존의 의견수렴 과정은 상대적으로 형해화한 숫자와 그에 바탕으로 한 부분적 시사점 도출 수준에 머물러 있다. 숙의의 자리는 사라지고, AI가 만든 요약문이 정책의 근거로 제시된다. AI가 효율을 높이는 만큼, 참여의 깊이는 얕아지고 있다. 이것이 기술이 만든 새로운 참여의 역설이다.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 다양하게 진행되고 있다.

AI 시대의 민주적 숙의, 해외의 실험들

해외에서는 이미 AI를 숙의의 도구로 활용하는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고 그 구체적인 사례는 다음과 같다.

프랑스에서는 대통령 주도로 정부가 국민에게 중요한 문제에 관해 모든 사람이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의 국민 토론을 실시한다. ‘그랑드 드바 내셔널(Grand Débat National)’이다. 여기에서 수백만 건에 이르는 전국의 시민 의견을 수집해 인간보다 효율적인 AI로 분류하고 요약했다. 중요한 것은 AI가 ‘결론’을 내리지는 않았으며, 오히려 AI는 인간적 숙의의 출발점을 정리하는 보조자 역할을 했다.

캐나다 정부에는 ‘Policy Horizons Canada’라는 미래 예측 센터가 있다. 정부가 미래 지향적인 사고방식과 전망을 바탕으로 의사 결정을 강화할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한 곳이다. 학계, 대중, 그리고 국제적 관심을 끌 수 있는 콘텐츠를 제작하며, 정부의 정책 결정에 대한 논평을 게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센터는 AI가 예측한 미래 일자리 변화를 시민 참여형 토론을 통해 검증했고, 그 역시도 AI가 일방적으로 주도했다기보다는 AI가 제시한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사람의 토론으로 보완하는 ‘순환형 숙의 모델’이었다.

미국 스탠퍼드 숙의민주주의연구소는 AI 언어모델을 활용해 시민토론 내용을 분석하고 합의 가능성을 수치화했다. 덴마크의 Civic AI Forum에서는 시민이 직접 AI 윤리와 노동권 문제를 논의하며, 기술의 방향 자체를 공론의 주제로 삼았다.

이 모든 사례의 공통점은 명확하다. AI는 기존 인간 중심의 민주주의에 대한 절대적 대체자가 아니라, 숙의의 동반자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것을 노동정책에도 다음과 같은 원칙으로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 이미지투데이

노동정책에 적용할 세 가지 원칙

첫째, 데이터 중심 정책에서 ‘의미 중심 숙의’로 전환해야 한다. AI가 만들어내는 기존의 통계와 예측은 현실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노동자의 감정·불안·관계의 변화는 숫자만으로는 충분히 포착되지 않는다. AI가 분석한 자료를 숙의의 기초로 활용하되, 그에 대한 최종적인 해석과 판단은 노동자와 시민의 토론을 통해 완성돼야 한다.

둘째, AI 보조형 숙의 플랫폼을 도입해야 한다. AI는 대규모 설문응답과 의견을 자동으로 분류하고 요약할 수 있다. 효율성을 극대화할 수 있는 측면에서는 그런 장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것을 토대로 노동조합·시민단체·전문가가 참여하는 숙의 테이블을 구성한다면, 현장의 다양성을 더 공정하게 반영할 수 있다. AI는 참여자의 ‘의견’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의견 간의 중간적 가교’를 놓는 역할(Bridge Builder)을 해야 한다.

셋째, 투명한 알고리즘 거버넌스를 구축해야 한다. AI가 어떤 기준으로 노동자의 의견을 분류하고 어떤 언어를 더 가중치 있게 다루는지 공개돼야 한다. 노동조합이나 시민단체가 그 기준을 검증하고 개입할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공공정책의 신뢰는 기술의 투명성에서 출발한다.

한국의 과제 ‘AI 보조 기반 숙의형 노동정책’으로

지금의 한국에서 노동정책 환경은 상당히 복잡하다. 공적 체계가 만들어진 뒤 수십 년간 공전하고 있는 노사정 대화는 반복적으로 교착되고, 청년·비정규·플랫폼 노동자 등 변화한 환경에서 새로운 이해관계자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그 모든 것을 담아내는 혁신적 노동정책은 크나큰 난제다. 이 모든 목소리를 하나의 정책으로 담아내려면, 새로운 숙의의 기술이 필요하다.

AI기반 숙의 플랫폼은 이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 AI가 대규모 의견을 구조화하면 숙의 전문가와 현장 대표가 그 내용을 해석해 구체적 정책 대안을 만드는 방식이다.

노동부나 지자체의 고용정책, 산업전환 대응, 노동시간 제도개편 등 주요 사안에 이런 구조를 도입한다면, 행정의 효율과 시민참여의 깊이를 함께 높일 수 있다. 이러한 ‘AI 보조기반 숙의형 정책설계’의 중간 매개자로서 기능하는 전문기구 또한 필요할 수 있다. 자칫 메마를 수 있는 데이터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고, 숙의 결과를 정책적 언어로 정리하는 역할 또한 필요할 수 있다.

기술이 아니라 사람의 대화가
결국은 민주주의를 완성한다

AI가 아무리 발전해도 정책의 품질을 결정하는 것은 여전히 사람 간의 대화와 신뢰다. AI는 숙의를 빠르게 만들 수 있지만, 질적으로 깊게 만들 수는 없다. 정책의 민주성은 데이터 분석이 아니라 서로의 말을 듣고 나누는 과정에서 자란다. AI 시대의 노동정책은 기술이 아니라 그런 정교한 설계를 바탕으로 해야만 해결될 수 있는 복잡다단한 문제다. AI가 ‘대신’ 듣는 사회가 아니라 AI가 ‘함께’ 듣는 사회, 그 사회에서는 기술이 아니라 사람이 민주주의의 중심에 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금 다시 설계해야 할 공공 의견수렴의 미래다.

박건영 메타보이스㈜ 대표 (fengels@metavoice.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