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리와 현실 사이 ‘근로조건 대등결정’ 딜레마

2025-11-19     정길남
▲ 장길남 공인노무사(민주노총 법률원 광주사무소)

노동자 A는 어느 날 사용자 B로부터 해고통지서를 받았다. 해고통지서에는 해고일, 사용자 B가 회사 취업규칙의 어떤 조항을 근거로 해고를 통보하는지, 그리고 노동자 A를 왜 해고하는지가 적혀 있었다. 노동자 A는 통지서를 천천히 읽어나간다. “근무조건 변경을 제안하였으나 거절하였으므로 해고함.” 이것이 그가 해고된 이유였다. 그렇다면 노동자 A가 사용자 B의 근무조건 변경 제안을 거절한 사실은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있을까?

정답부터 얘기하면, 위 사유는 해고의 정당한 이유가 될 수 없다. 다시 말해 사용자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노동자에게 ‘불리한’ 근로조건 변경을 제안하더라도, 노동자는 이를 거절할 수 있으며 사용자는 그 거절을 이유로 노동자를 해고할 수 없다. 근로기준법 4조는 이 같은 노동자의 거부권에 대한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있다. 근로조건은 근로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근로기준법 4조와 관련 법리에 따라 이러한 해고 사유가 정당한 해고 사유가 될 수 없다고 본 판례는 적지 않다. 예컨대 ① 노동자가 사용자의 근로시간 단축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갱신거절을 당한 사건 ② 영업양도 과정에서 양수인이 제시한 삭감된 연봉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양도기업 소속 노동자의 고용승계를 거절한 사건 ③ 정규직으로 입사한 노동자가 사용자 필요에 따라 기간제 근로계약에 서명했으나 사용자가 그 계약을 근거로 기간만료 해고를 통보한 사건에서 법원은 모두 사용자의 해고가 정당하다고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법리가 확립된 이후, 사용자가 일방적으로 불리한 근로조건 변경을 제안하더라도 노동자가 이를 쉽게 거절할 수 있게 됐을까? 또 만약 노동자가 사용자의 일방적 근로조건 변경을 거절했다는 이유로 해고되더라도, 노동자는 위 법리를 근거로 적극적으로 부당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하려 할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정확히 말하면, 위 법리로 인해 노동자의 권리의식이 크게 높아졌다거나 노동자의 선택 폭이 넓어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우선 노동자가 해고의 위협을 감수하면서 사용자 제안의 불리한 근로조건을 거부하기란 쉽지 않다. 노동위원회나 법원에서 부당해고를 다투려면 시간과 비용(대리인 선임을 포함한)을 감수해야 하고, 그 결정을 내리기까지 노동자는 계속 고민할 수밖에 없다. 어쩌면 자신이 당한 해고에 부당성을 다툴 수 있는지보다는 자신의 해고 사유가 실업급여 신청이 가능한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도 있다.

현실에서 근로기준법 4조 ‘근로조건 대등결정 원칙’은 제대로 작동하기 어렵다. 사용자가 개별 노동자의 채용·해고·승진 등의 결정권을 쥐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대법원조차 근로조건 결정 과정에서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가 아니라, 사용자가 우월한 지위를 가진다는 점을 일관되게 인정하고 있다.

정보·교섭력·경제적 지위 등에서 사용자는 노동자에 비해 우월한 위치에 있다. 그 우월한 지위는 일방적인 근로조건 변경, 이를 거부한 노동자에 대한 부당해고, 동의 없는 임금 삭감과 임금체불 등 여러 불리한 결과로 이어진다. 이곳의 구성원들은 이러한 구조적 불균형 속에서 노동자들이 노동분쟁 상황에 놓였을 때, 어떻게 하면 이들이 온전히 노동 3권을 실현할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 끊임없이 노사가 처한 상황을 분석하고 법률적으로 이들을 지원할 방법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이들에게 제안한다. 나 역시 이곳의 구성원으로서 같은 지향점을 가지고 업무에 임하고 있다.

근로조건 대등결정의 원칙은 아직 갈 길이 멀다. 하지만 나는 아직 이를 실현하기 위한 고민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