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신호위반 교통사고 라이더 ‘업무상 재해’
서울행정법원 “업무 중 통상적 위험, 단순 위반으로 산재 불승인 위법”
배달라이더가 비 오는 날 빨간불에 직진하다가 좌회전 차량과 부딪혀 사고가 났다면 “업무상 재해”라는 법원의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는 “공단이 사고의 구체적 경위와 근로환경을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신호위반 사실만을 근거로 불승인 결정을 내린 것은 위법하다”며, “요양불승인처분을 취소한다”고 판시했다.
서울행정법원은 11일 배달라이더 ㄱ씨가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제기한 요양불승인처분취소 소송에서 이같이 판결했다. ㄱ씨는 지난 2024년 평택시 한 교차로에서 전방 적색 신호를 위반해 직진하다가 우측에서 좌회전하던 차량과 충돌하는 사고를 일으켰다. 이 사고로 ㄱ씨는 오른쪽 종아리뼈가 부러지고, 갈비뼈 여러 개가 함께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사고 당시 평택시에는 시간당 9밀미미터가량의 비가 내리고 있었으며, ㄱ씨는 이미 다섯 건의 배달을 마친 뒤 여섯 번째 배달 중이었다. ㄱ씨는 사고 후 2024년 5월13일 근로복지공단에 요양급여를 신청했지만, 공단은 “신호위반은 교통사고처리특례법상 범죄행위로, 산재보험법 37조2항에 따라 업무상 재해로 볼 수 없다”며 산재를 불승인했다.
법원은 공단의 처분이 “업무 중 통상적으로 수반되는 위험의 범위 내 사고를 단순히 신호위반만으로 배제한 잘못된 판단”이라고 지적했다. 재판부는 “배달노동자는 고객의 불만을 피하기 위해 신속하게 배달할 필요성이 높고, 운전 중 교통사고는 업무수행과 밀접하게 연결된 위험”이라며 “ㄱ씨가 비 오는 날 집중력이 일시적으로 떨어져 신호를 놓친 것으로 보일 뿐, 고의로 신호를 무시했다거나 현저히 주의를 게을리한 증거는 없다”고 밝혔다. 또 “산재보험법 37조2항은 근로자의 ‘범죄행위가 직접 원인이 되어 발생한 부상’만을 배제 대상으로 삼고 있다”며 “ㄱ씨의 사고는 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덧붙였다.
배달 플랫폼 산업이 급성장하면서 비·눈 등 악천후나 과도한 시간 압박 속에서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례가 늘고 있다. 그러나 공단은 종종 ‘신호위반’이나 ‘안전수칙 위반’을 이유로 요양을 거부해 왔다. 이번 판결은 법원이 “형식적 법규 위반보다 실제 업무수행 중 발생한 위험의 성격을 우선 고려해야 한다”는 원칙을 확인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업무 특성상 위험을 감수할 수밖에 없는 배달노동자에게 일상적 부주의를 ‘범죄행위’로 단정해 산재를 배제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 법원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