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혜란 반조 대표] 의사 가운 벗고 ‘노동자의 손’ 만들다

국내 최초 기능성 손가락 의수 개발한 직업환경의학 전문의

2025-11-05     김미영 기자
▲ 정기훈 기자

책상 위에는 3D프린터로 찍어낸 손가락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분홍색, 보라색, 청록색 같은 감각적인 색의 플라스틱 조각이지만, 형태만큼은 인간의 손마디를 닮아 있었다.

“둘레 여섯 가지, 길이 세 가지. 그래서 열여덟 개 모델이에요.”

지난달 29일 수원 차세대융합기술원에서 만난 최혜란(39·사진) 반조 대표가 모듈형으로 개발된 의수를 손가락에 끼우며 설명했다. “남은 손가락으로 이 바닥을 누르면 자연스럽게 구부러져요.” 전시용 모델이라 움직임이 다소 뻣뻣했지만, 플라스틱 관절을 통해 손가락을 잃어버린 노동자가 쥐고, 잡고, 누르는 일상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최 대표는 직업환경전문의이자, 국내 최초로 기능성 손가락 의수를 개발한 창업가다.

퇴직금으로 만든 첫 번째 의수
“절단된 희망을 잇는 새로운 손가락”

정기훈 기자

최혜란 대표의 시간은 두 갈래로 나뉜다.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그는 의학전문대학원에 진학해 직업환경의학과를 선택했다.

“전공의 시절, 다른 진료과는 수술 스킬이나 처방법을 숙련하는데 직업환경의학과는 직업병과 환경성 질환을 보는 ‘감각’을 키워요. 현장에서 위험요소를 발견하고, 의사가 할 일을 찾는 것, ‘관점’에 대한 트레이닝이 중요하죠.”

그는 직업환경의학을 “몸을 고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다시 일할 수 있게 돕는 의학”이라 정의했다.

하지만 막상 직업환경전문의가 됐을 때 그는 서류 더미와 싸워야 했다. 근로복지공단이 산재를 승인하려면 그 질병이 ‘일 때문인지 아닌지’를 따져야 하는데 직업환경전문의 몫이다. 공단 대전병원에서 근무했던 그는 작업환경측정, 진료기록, 진술서 따위의 서류와 영상에 묻혀 정작 환자의 얼굴은 볼 수도 없었다.

“의사인데, 환자랑 대화하는 시간보다 문서 보는 시간이 훨씬 많았어요. 이게 내가 하려던 직업환경의학이 맞나 싶었죠.”

그는 서류가 아닌 환자를 만나기 위해 검진센터로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이번엔 매일 수십 명의 환자를 ‘분 단위’로 만나야 했다.

“문진표에는 ‘어깨가 아프다’ ‘손이 저리다’ ‘밤에 잠을 못 잔다’ 같은 체크가 빼곡했어요. 그런데 그 한 줄 한 줄을 물어볼 시간이 없었어요. 눈으로만 확인하고 도장을 찍어야 했죠. 진료실 밖에는 이미 스무 명 넘는 사람들이 줄을 서 있고, 직원은 ‘과장님, 빨리 좀 해주세요’라고 재촉하니까요.”

그때 무력감이 찾아왔다.

“분명히 ‘불편하다’고 적은 사람인데, 그게 단순 통증인지, 일하다 다친 건지, 마음이 아픈 건지도 물어볼 시간을 낼 수가 없었어요. 의사인데 환자 얘기를 들을 수 없다는 게 제일 힘들었어요.”

그래도 공단에서의 시간은 무의미하지 않았다. 그는 ‘직장복귀 지원팀장’을 자청해 산재노동자의 복귀를 돕는 다학제 회의를 꾸렸다. 그 결과, 300명 중 40명이 다시 일터로 돌아갔다. 그러나 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목수, 농부, 기계조작 노동자가 많았어요. 손가락이 없으면 일을 못 하는데, 기능성 의수가 없는 거예요. 국내엔 미관용 실리콘 의수만 구할 수 있어요. 유일하게 미국에서 기능성 의수를 살 수 있는데 제품은 비싸고(개당 800만원) 보험도 안 되고, 심지어 미국에 직접 가야 살 수 있는 상황이었죠. ‘이건 아니다’ 싶었어요.”

공단 재활공학연구소와 공동개발을 시도했지만 “기술적으로 어렵다”는 답만 돌아왔다. 환자를 도울 방법이 더는 없었다. 결국 그는 의사 가운을 벗었다.

정기훈 기자

그렇게 퇴직하고 방황하던 중, 미산정됐던 퇴직금 1천만원이 뒤늦게 입금됐다. 그 돈으로 기능성 의수 시제품을 만들었다. 한 마디 절단형과 두 마디 절단형 두 가지 모델이었다.

“공단에서 받은 돈이니, 공단에서 못 했던 일을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결과물은 놀라울 만큼 잘 작동했다. 그날 이후 그의 인생 궤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반조를 창업하고 2023년 여성특화 예비창업패키지 선정, 2024년 정부지원사업, 2025년에는 스타트업 투자 유치까지 이어졌다.

“남편에게 3년 안에 투자금 10억원을 못 모으면 그만두겠다고 약속했어요. 지금 7억2천만원까지 조달했습니다. 아직 매출은 없지만 ‘상업성을 인정받았다’고 우기면서 버티는 중이에요.”

“나는 지금이 더 의사답다”

사장이 된 그는 지금이 오히려 “더 의사 같다”고 말한다. “검진할 땐 환자에게 쓸 시간이 1분도 안 됐어요. 지금은 사용자의 이야기를 두 시간씩 들어요. 불편함을 욕해도 좋다고 말해요. 그래야 고칠 수 있으니까요.”

반조의 손가락 의수는 단순히 ‘손의 모양’을 되찾는 장치가 아니다. 잃어버린 손끝의 감각, 그 손끝으로 이어지던 삶의 리듬을 되살리는 도구다.

“처음엔 다들 ‘물건을 잡을 수 있느냐’만 물어요. 그런데 진짜 중요한 건 컵을 미끄러뜨리지 않고, 단추를 잠그는 그 작은 동작이에요.”<상자기사 참조>
 

환자마다 절단된 손가락의 둘레와 남은 길이가 모두 달라서 의수는 ‘맞춤 제작’이 필수다. 복잡한 제작 과정 때문에 높은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반조는 이 문제를 ‘표준화된 맞춤’이라는 역발상으로 해결했다. 손가락 둘레를 6가지 종류로 표준화하고, 각 둘레마다 길이를 S, M, L 3가지 옵션으로 제공해 총 18개의 표준 모델을 구축했다. 수지절단 환자는 복잡한 맞춤 제작 과정 없이도 자신의 신체에 가장 가까운 최적의 모델을 선택할 수 있다.

반조 의수의 가장 직관적이면서도 혁신적인 지점은 바로 구동 방식에 있다. 별도의 배터리나 전자 장치 없이, 순수하게 사용자의 남은 손가락 마디 힘으로 움직인다. 사용자가 남아있는 손가락 관절을 구부려 의수 내부의 바닥 면을 누르면, 그 힘이 지렛대 원리로 전달돼 의수 끝부분이 자연스럽게 구부러지는 기계식 메커니즘이다. 이 방식은 복잡한 동력 장치가 필요 없어 내구성이 높고, 사용자가 자신의 몸처럼 직관적으로 제어할 수 있다는 큰 장점을 가진다.

손이 아니라 삶을 되찾은 사람들
 

반조의 의수는 단순한 보조기구가 아니다. 잃어버린 손가락의 기능을 넘어, 일상과 ‘나답게 살 권리’를 회복하게 하는 도구다. 최혜란 대표가 가장 또렷이 기억하는 건 세 명의 사용자다.

반조

첫 번째는 프레스 사고로 손가락을 잃은 중년 여성이었다. 손가락은 사라졌지만 뇌는 그 사실을 종종 잊는다. 이 때문에 그는 사고 이후 물건을 제대로 잡지 못했다. 사고 이전엔 익숙했던 냄비 손잡이, 수저, 컵이 자꾸 떨어졌다. 주방에서 멀어지면서 자존감도 떨어졌다. 실리콘 미관용 의수는 보기엔 멀쩡했지만, 아무 쓸모가 없었다.

반조의 기능성 손가락을 착용한 뒤, 그는 비로소 ‘움직이는 손’을 다시 얻었다. 떨어뜨리던 물건을 잡을 수 있게 되자, 자신감이 돌아왔다.

최 대표는 “의수가 기능을 회복시킨 게 아니라, ‘나도 할 수 있다’는 마음을 돌려준 것”이라고 말했다.

두 번째는 쓰레기 소각장 노동자였다. 스티로폼 절단기 사고로 손가락 한 마디를 잃은 그는 다시 현장으로 복귀해 일을 하고 있다. 반조의 의수를 착용했는데 문제가 생겼다. 안전을 위해 반드시 장갑을 착용해야 하는데 의수가 끼워진 손은 장갑이 들어가지 않았다.

“결국 일할 때는 의수를 빼야 했어요. 손을 보호하려고 만든 장치가, 오히려 복귀의 걸림돌이 된 거죠.” 최혜란 대표는 이제 의수를 착용한 채로 장갑을 낄 수 있는 맞춤 솔루션을 개발 중이다.

세 번째는 작은 옷가게를 운영하는 상인이었다. 그는 오랜 취미였던 바이올린 연주를 사고 이후 포기했다.

“그분은 제품 사진을 보고 먼저 연락을 주셨어요. ‘이걸로 다시 바이올린을 켜볼 수 있을까요?’ 하고요.”

최 대표는 바이올린 활을 단단히 잡을 수 있도록 손가락 끝의 구조를 바꾸는 연구를 시작했다. “아직은 잡는 힘이 약해서 개선 중이에요. 그래도 ‘다시 음악을 한다’는 그 말이 저한테는 너무 큰 동력이 됐어요.”

최 대표는 이 사례들을 단순한 사용자 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의수를 낀다는 건, 단순히 손가락이 생긴다는 게 아니에요. 다시 일을 하고, 집을 꾸리고, 자신을 존중하는 감각을 되찾는 일이죠.”

김미영 기자

기능성 손가락 의수 필요한 사람들
국내 13만명, 세계 5억명

사명인 반조는 한자로 ‘동반자(伴)’ ‘도움(助)’을 뜻한다. 의수가 필요한 사람들의 곁에서 삶을 돕는 동반자가 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손가락 부분 절단 장애 등록자는 약 13만명, 매년 새로 생기는 사고는 1만2천건이에요. 접합 성공률 80%를 고려하면 매년 2천명 정도가 절단 상태로 남죠. 최근엔 외국인 노동자가 많고요.”

세계적으로는 누적 손가락 절단 경험자가 5억명, 신규 발생 880만명 수준이다.

“관절을 침범하지 않는 경미한 절단까지 포함한 수치지만, 상당수는 ‘쥐는 기능’을 잃은 채 살아갑니다.”

하지만 의료기기 시장에서 손가락 의수는 ‘비어 있는 영역’이었다.

“기술 난이도가 높아요. 구조·동역학 해석을 할 수 있는 기계공학 석사급 인력이 필요한데 기존 의료보조기업체의 역량으로는 어렵죠. 업계 자체가 영세해 최근 3년간 R&D 경험이 없는 곳이 90% 이상이에요. 그러니 아무도 손대지 못했던 거죠.”

반조는 이런 ‘공백’을 파고드는 스타트업이다.

“좋은 아이템만으로는 사업이 안 됩니다. 공단 연구소를 설득하려고 시장 조사를 했어요. 환자가 복귀하면 산재보험 재정이 얼마나 절감되는지 숫자로 설득해야 하니까요. 그 경험이 투자와 정부지원 심사에서 그대로 통하더라고요. 시장성과 사회적 효과를 동시에 증명해야 제도도, 사업도 움직입니다.”

업무 ‘관련성’보다 중요한 것은 업무 ‘적합성’

지금의 산재의료 체계는 여전히 “이 병이 직업병이냐 아니냐”를 가르는 업무관련성 평가에 인력과 시간이 쏠려 있다. 최혜란 대표는 직업환경전문의의 역할을 “이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일할 수 있는지”를 평가하는 업무적합성 평가 중심으로 전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직업병 인정 여부를 가르는 일은 표준화·자동화가 가능한 반복 업무에 가깝고, 생성형 AI 등 기술로 상당 부분 대체할 수 있다. 반면, 손상 정도와 기능을 평가해 ‘어떤 일을, 어느 수준까지, 어떤 보조기기나 근무환경 조정으로 수행할 수 있는지’를 설계하는 일은 여전히 현장과 노동을 이해하는 의사의 고유 영역이다.

“힘들게 키운 전문의를 서류 더미에 파묻어 두는 건 국가적 손실이에요.”

그는 직업환경의학과 전문의가 사업장 방문, 다학제 회의, 직장 복귀 계획 수립 같은 업무 적합성 판정에 더 많은 시간을 쓸 수 있도록 제도와 인력 배치를 재편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야 산재보험이 ‘질병 판정 시스템’을 넘어 ‘복귀와 회복을 지원하는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 대표가 만든 것은 손가락 한 마디를 대신하는 작은 의수이지만, 그것이 이어 붙이는 건 ‘일의 가능성’이다.

“저는 이게 반드시 필요한 일이라고 믿어요. 그래서 끝까지 해보려고 합니다.”

글=김미영 기자
사진=정기훈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