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율의 이름으로 지워진 평등의 자리] 민간단체 고용평등상담실 확대 복원을 바라며
효율의 이름으로 지워진 평등의 자리
민간단체 고용평등상담실의 확대 복원을 바라며
이슬아 공인노무사 ((사)여성노동법률지원센터 사무국장)
사람이 삶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노동 또한 마찬가지다. 안정적인 고용 보장과 체불 없는 임금 지급, 일하다 다치거나 죽지 않을 권리, 그리고 불편한 대화나 원치 않는 접촉으로부터 자유로운 일터.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노동조건이다.
1998년 정부는 지방노동관서 46곳에 ‘여성차별해고 신고창구’를 설치했고, 2000년 5월부터는 민간단체에 ‘고용평등상담실’ 지원을 시작했다. 일정 기간 병행 운영하던 두 체계는 민간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 아래 관할 신고창구를 폐지하고 민간 상담실 중심으로 전환됐다. 이후 2023년까지 전국 19곳으로 확대되며 직장내 성희롱·성차별·임신·출산 관련 불이익 등 다양한 고용평등 사안을 다뤄왔다. 그러나 2023년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민간단체 고용평등상담실을 전면 폐지했다.
2015년 이후 직장 내 성희롱 상담 건수는 꾸준히 늘었고, #미투 운동 이후에는 연간 3천건이 넘는 상담이 이어졌다. 이 상담들은 단순히 사건을 접수하고 종결하는 절차가 아니라 피해자의 회복과 복귀, 조직문화 개선까지 밀착해 해결해 가는 장기 과정이다. 그만큼 전문성과 신뢰, 그리고 내담자와의 관계 형성을 위한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바로 이 점이 민간단체 고용평등상담실의 강점이었다. 피해자들은 “행정기관에서는 편하게 말하기 어렵다”고 토로해 왔다. 행정 절차 중심의 상담과 달리 민간단체 상담실은 피해자의 언어와 속도로, 안전하게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노동상담 또한 단순한 법 조항 안내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다양한 고용형태와 현실을 반영한 다각적 접근, 제도 개선을 위한 사회적 합의와 연대가 필요하다. 민간단체는 이 점에서 행정기관이 결코 대체할 수 없는 역할을 수행했다. 행정은 법 위반 사실을 조사하고 시정을 명령하는 책임을 지며, 민간은 현장의 신뢰와 감수성으로 노동자의 회복과 변화를 이끌어 왔다. 두 영역은 경쟁 관계가 아니라 서로의 한계를 보완하는 협력 관계여야 한다.
그러나 민간 고용평등상담실 폐지 이후 고용노동부는 각 지방청에 ‘고용평등상담지원관’을 공무직으로 고용해 그 기능을 대체하려 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불과 8개 지청에 그쳤고, 상담 사각지대는 오히려 넓어졌다.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심리적 거리’는 더 벌어졌다. 피해자들은 다시 “이 문제를 어디에 가서 말해야 하나”를 묻고 있다.
정부는 여전히 ‘효율’의 논리를 내세운다. 민간의 전면 확대 복원이 아닌 예산의 3분의 1만 배정해 부분적 운영을 검토하고 있다. 민간은 사각지대만 맡으면 된다는 식이다. 이는 피해자 지원을 ‘사업 효율성’으로 재단하는 접근이며, 인권과 존엄의 문제를 행정 편의로 치환하는 위험한 발상이다. 고용평등상담실은 단순한 상담창구가 아니었다. 시민단체의 운동성과 현장성을 바탕으로, 개별 사건을 넘어 노동 현장의 변화를 이끌어 왔다. 상담을 통해 드러난 문제를 구조적으로 분석하고, 자원을 연계하며, 공론화를 통해 법·제도 개선까지 이어 온 것이다. 실제로 직장내 성희롱 예방교육 의무화나 남녀고용평등법 개정 등 많은 변화의 밑거름에는 이들의 노력이 있었다.
행정관청이 할 일은 명확하다. 문제 사업장을 지속 모니터링하고, 피해자가 일터로 복귀한 이후에도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지원하며, 재발 방지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행정의 권한은 감시와 시정에, 민간의 역할은 회복과 변화에 있다. 그 둘이 함께할 때 진정한 고용평등이 실현된다.
‘효율’은 결코 ‘존엄’을 대신할 수 없다. 노동현장에서 평등과 안전을 지키기 위해서는 민간 고용평등상담실의 전면적이고 안정적인 복원이 필요하다. 그것이 우리가 사람답게 일하고,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