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시간 넘어 노동강도 줄이는 사회로
노동정책 담론에서 가장 익숙한 지표는 노동시간이다. 한국사회가 ‘과로사회’라는 비판을 받아온 것은 장시간 노동이 큰 몫을 했지만, 그것만의 문제는 아니다. 높은 노동강도, 낮은 자율성, 불안정한 고용조건이 함께 얽히며 과로의 구조를 만들어 왔다. 현 정부는 ‘임금 삭감 없는 주 4.5일 근무제’를 청사진으로 내세우고 있다. 주 40시간제를 기준으로 한 주 5일제가 2004년에 도입된 지 20여년 만에 다시 한번 노동시간 체계의 큰 변화가 예고되는 셈이다. 그러나 중요한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노동시간이 줄어든다고 해서 노동자의 건강과 삶이 정말 개선될까?
법정노동시간 단축이 기업의 생산성과 생산활동에 미치는 영향을 실증 분석한 국내 연구가 있다. 2000년부터 2012년까지 종사자 20인 이상 제조업체를 추적한 결과, 주 40시간제가 도입되자 노동시간은 줄었지만 인력이 충원되고 자본투자가 늘면서 부가가치도 증가했다. 총요소생산성과 노동생산성(부가가치/종사자 수)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노동시간이 줄었으므로 시간당 생산성은 상승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연구는 결론 내렸다. 이 연구에서 핵심은 분명하다. 시간이 줄면 당연히 사람이 더 뽑혀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법정노동시간은 줄어도 업무량은 그대로이거나 오히려 늘 수 있다. 제조업만이 아니라 IT·게임업계처럼 프로젝트 단위 성과가 중요한 업종에서는 단축된 시간 안에 더 많은 일을 해내야 하는 압축노동이 흔하다. 유형의 제품으로 산출을 측정하기 어려운 업종에서는 노동량을 계량화하기조차 힘들지만, 노동자가 체감하는 노동 밀도는 분명히 높아지고 있다.
따라서 노동시간 논의는 노동량과 노동강도라는 차원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노동량은 일정 시간 안에 달성해야 하는 산출물의 크기다. 콜센터 상담원은 하루 처리 건수가 줄지 않는 한 노동시간이 단축되더라도 상담 속도를 높여야 한다. 택배기사는 배송 물량이 그대로라면 더 잦은 이동과 상·하차를 감당해야 한다. 또 노동시간과 노동량이 같더라도 노동자의 심리적·신체적 조건에 따라 체감하는 노동강도는 전혀 달라질 수 있다. 노동강도는 노동시간과 노동량을 넘어, 노동자가 실제로 경험하는 신체적·정신적 부담을 포착한다. 같은 조건의 업무라도 연령, 성별, 건강 상태, 숙련도, 조직 문화에 따라 체감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노동강도를 단순히 물리적 안전 문제로 협소화하거나 교차적 불평등을 고려하지 않는다면 평가가 제대로 이뤄졌다고 볼 수 없다.
현재 노동강도를 평가하고 관리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이 활용되고 있다. 심박수·산소섭취량 같은 생리학적 지표, 작업 자세·하중·반복성을 점수화하는 RULA·REBA 같은 도구, 감정노동과 업무부담을 측정하는 자기보고식 설문까지 폭넓게 쓰인다. 예컨대 국내 자동차 공장에서는 RULA·REBA를 적용해 위험 점수가 높은 공정을 찾아내고 작업대를 재설계하기도 한다. 한국근로환경조사는 감정노동과 업무강도 문항을 통해 고객 응대 노동자의 정신적 부담을 드러냈고, 이는 ‘감정노동자 보호법(산업안전보건법 41조)’ 제정으로 이어졌다. 최근에는 택배 분류작업에 NIOSH 리프팅 공식을 적용해 적정 하중을 산출하거나, 돌봄노동자에게 웨어러블 심박계를 착용시켜 실시간 스트레스 반응을 추적하는 연구도 진행되고 있다. 이런 사례들이 정책에 반영될 때 노동시간 단축은 단순한 구호가 아니라 실질적인 건강정책으로 작동할 수 있다.
노동시간 규제가 현재 실현 가능한 제도적 틀이고, 노동량은 생산성의 지표라면, 노동강도는 노동자의 몸과 마음을 가르는 사회적 변수를 포괄한다. 주 4.5일제가 진정한 개선책이 되려면 단순히 시간을 줄이는 데 그치지 말고, 노동강도를 평가하며 취약 집단의 차이를 반영하는 정책적 상상력이 필요하다. 노동자는 어떻게 일하는가, 그리고 그 환경은 누구에게 더 큰 부담이 되는가를 묻는 접근이 요구되는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