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전소 경상정비업무 수행 근로자들에 대한 불법파견을 인정한 판결
김병욱 변호사(법무법인 두율)
1. 사실관계의 요지
한국서부발전(주)(이하 ‘한국서부발전’)은 태안화력발전소 내 1호기 내지 10호기 발전기의 경상정비업무를 피고 한전KPS(주)(이하 ‘피고)에 매년 도급계약 형식으로 위탁해 왔고, 피고는 이를 다시 전기설비 부문과 기계설비 부문으로 나누어 6개월 또는 1년 단위로 협력업체와 각 재하도급 계약을 체결하는 형태로 위탁해 왔다.
이 사건 원고들은 재하도급 협력업체 소속으로 한국서부발전이 피고에게 위탁한 발전설비의 경상정비업무 중 일부를 수행해온 근로자들로서, 십수년에 걸쳐 협력업체 변동과 무관하게 고용승계돼 오면서 전체 24인의 원고 가운데 13인은 전기설비에 대한 경상정비업무, 나머지 11인은 기계설비에 대한 경상정비업무를 각 담당했다.
이 사건 원고들은 계약의 형식과 달리 피고 소속 정규직 근로자들의 지시를 받으며 종속된 형태로 업무를 수행하였고, 수시로 공동작업을 수행하는 등 피고 조직에 실질적으로 편입됐다고 주장하며 직접 고용관계 형성에 따른 파견근로자의 보호 등에 관한 법률(파견법)상 고용간주와 고용의무의 이행을 구했다. 아울러 원고들은 피고에 대한 근로자지위 인정을 전제로 받을 수 있었던 임금과 협력업체로부터 지급받은 임금간의 차액 상당의 금원에 대하여 손해배상을 구했다.
2. 사건의 쟁점 및 법원의 판단
이 사건의 쟁점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원고들이 도급계약의 형식과 달리 실질적으로 파견 형태로 근로를 했는지, 나아가 파견관계를 전제한 손해배상금액으로서 피고가 차액 임금 상당의 금액을 지급할 의무가 있는지에 관한 부분이다.
먼저 법원은 원고들과 피고 사이의 계약관계의 실질을 파견근로관계로 인정했다. 법원은 피고 소속 근로자들도 수행하는 정비·점검업무와 원고들이 수행하는 정비·점검업무가 분명히 분리되거나 구분되지 않는 점, 피고가 설비별로 피고 직원을 작업책임자로 지정하고 원고들을 조원으로 지정하여 2명 이상의 팀 단위로 업무를 수행하면서 원고들이 자연스럽게 피고 직원의 구두 지시에 따라 정비업무를 수행했던 점, 작업책임자인 피고의 관리·감독 아래 위험작업·전기작업을 수행했던 점을 인정하며, 원고들이 피고 조직에 실질적으로 편입돼 피고의 직·간접적인 지휘,통제에 따라 업무를 수행했다고 판시했다.
또한 피고가 매일 아침 원고들을 포함하여 작업조를 편성하면서 작업별 인원수와 작업 수행인원을 지정하거나 피고의 필요에 따라 원고들을 영월·영흥 등 타사업소에 파견하기도 하는 등 원고들의 작업 장소 및 인력배치 권한을 보유하고 있었고, 하도급계약서상 기재된 역무 범위 기재에 의하더라도 피고의 업무와 구별하기 어려운 점, 작업복·마스크·안전화 등 소모품을 제외한 원고들의 작업에 사용하는 장비와 비품을 피고가 제공했고, 사무실 또한 피고로부터 무상으로 제공 받은 점을 인정했다.
이와 관련하여 피고는 이 사건 원고들이 제출한 증거의 작성시기나 내용이 일부 시기와 당사자에 편중돼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그 효력에 대하여 다투었으나, 법원은 피고가 연속적인 하도급계약을 체결하며 근로관계를 승계했고, 업무 형태나 방식에 변경이 있었다고 볼 사정이 없다는 점을 들어 피고의 주장을 배척하면서 원고들과 피고가 근로자파견관계를 형성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두 번째로 원고들의 임금차액 및 임금차액 상당의 손해배상청구와 관련하여 법원은 피고 소속 4직급 근로자를 비교대상근로자로 인정하고, 4직급 근로자가 받았던 임금을 기준으로 피고의 차액임금 상당의 금원 지급의무를 인정했다.
해당 쟁점과 관련하여 피고는 4직급 근로자의 경우 원고들과 달리 문서작업을 포함한 행정·안전 업무를 상당한 비율로 수행하고 있고, 자격증을 취득했다는 점을 강조하며 원고들에게 기존 근로조건이 그대로 유지돼야 한다고 반박했으나, 법원은 원고들과 함께 근무한 피고 근로자들이 대부분 4직급이었고, 업무의 내용에 본질적 차이가 있다고 볼 수 없으며, 자격증의 유무는 업무의 동종·유사성과 무관하다고 하여 피고의 주장을 배척했다.
3. 대상판결의 의의
대상판결은 재하도급구조에서 말단의 하청업체 소속으로 화력발전소 발전설비의 경상정비업무를 수행해온 근로자들에 대하여 한국전력공사의 자회사인 피고의 불법파견을 인정했다는 점에서 적지 않은 의의가 있다.
종래 도서지역에서 발전소 운영·정비업무를 수행해온 근로자들에 대하여 한국전력공사의 불법파견을 인정하는 판결이 2023.6.경 내려진바 있는데(광주지방법원 2023. 6. 9. 선고 2020가합52448 판결), 이번 판결을 통해 한국전력공사의 발전설비 운영과 건설·정비보수업무를 담당해온 자회사인 피고 또한 하도급을 가장하여 불법파견 형태로 협력업체로부터 근로를 제공받아 왔다는 사실이 인정됐다.
발전설비의 이상 유무에 대한 일상 정비·점검업무를 뜻하는 경상정비 업무는 화력발전시스템의 유지·운영 과정에서 핵심업무이면서, 상시업무로서 외주화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러나 무분별한 발전산업 민영화 과정에서 경상정비 업무 중 상당 부분은 공기업인 피고를 거쳐 영세 협력업체들에게 재하도급돼 수행돼 왔다. 이에 따라 위험은 외주화됐고 고용의 불안정성은 강화됐다. 이 사건 원고들과 같은 협력업체 소속으로 올해 6월경 선반 작업 도중 기계 끼임 사고로 사망한 고 김충현 노동자의 죽음과 발전회사들의 무분별한 위험의 외주화는 결코 무관하지 않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비용절감과 위험의 외주화 외에 피고와 협력업체의 도급계약에 어떤 필요성이 있었는지 알 수 없다고 적었다. 법원은 원고들의 불법파견을 인정함으로써, 비용절감 목적의 무분별한 위험의 외주화에 대하여 경종을 울린 것이다. 나아가 고용의 안정성이 작업환경의 안전성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 않다는 점을 확인한 것이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발전소 내의 위법한 재하청구조가 시정되고, 경상정비 업무를 포함하여 상시업무, 핵심업무를 수행해온 근로자들을 직접 고용하는 전환점이 마련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