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 화성공장 노동자 자해 산재 인정 ‘재결서’ 살펴 보니
‘산재 불인정’ 질병판정위 결정 이례적으로 뒤집어 … 업무상 자해행위 인정기준 완화된 법리대로 판단
11년간 근로자지위확인 소송 끝에 정규직으로 전환된 노동자가 기존에 하던 업무가 아닌 다른 업무에 배치되면서 고통을 호소하다 결국 음독 자살을 시도한 사건이 최근 산재로 인정됐다. 근로복지공단은 당초 불승인 결정을 내렸지만 재심사 청구를 통해 초심 판단이 뒤집힌 것이다. 17일 <매일노동뉴스>는 산업재해보상보험재심사위원회 재결서를 확보해 구체적인 판단 근거를 살펴봤다.
정규직 전환 뒤 노동강도 센 부서 배치
전례 없이 2·4주마다 업무 변경
휴가 소진한 뒤 일터 복귀 직후 음독
사건은 대법원 승소 이후 A씨가 다른 부서로 배치된 시점인 2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기아 화성공장 사내하청업체에 생산직으로 입사해 생산관리2부에서 부품공급·서열업무를 담당한 A씨는 2011년 기아를 상대로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을 냈다. 2022년 10월, 소송 제기 11년 만에 대법원에서 최종 승소했다. 그런데 2023년 3월 A씨 포함 승소자들은 원래 하던 업무가 아닌 업무강도가 세기로 유명한 조립부로 가게 됐다. 더군다나 A씨는 ‘스킬업 교육’이라는 명목하에 전례 없이 2·4주마다 작업반이 변경되면서 낯선 업무에 배치됐다. A씨는 배치전환과 차별 때문에 어려움을 토로하다 휴가를 소진하고 다시 출근한 뒤 2023년 7월13일 오전 사업장내 주차장에서 제초제를 마시고 음독자살을 시도했다.
A씨는 음독 행위로 진단받은 뇌병변(기질성 뇌증후군)에 대해 업무와 상당인과관계가 있다고 주장하며 지난해 6월11일 근로복지공단 화성지사에 요양급여를 신청했다.
그런데 경인지역업무상질병판정위원회는 △A씨의 음독행위가 이성을 잃을 만한 상황, 이성적 판단이 어려운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판단하기는 충분하지 않은 점 △자살 기도와 관련한 남김 기록에서 특별한 내용이 확인되지 않고 자살 목적으로 제초제를 음독한 것이라고 진술한 점 등을 근거로 “정상적인 인식능력 등이 뚜렷하게 저하된 상태에서 제초제를 음독했다고 볼 사정이 없다”며 업무와의 관련성이 낮다고 판단했다.
공단 화성지사는 올해 1월15일 질병판정위 판정 결과에 따라 요양불승인 처분을 했다. A씨는 이에 불복해 2월4일 재심사 청구를 했다.
산재재심사위 “업무 스트레스·고통으로 음독 행위”
산재재심사위는 A씨가 자해 행위를 하기 전 이상행동들을 보였고, 그 이상 상태가 업무상 사유로 인한 것이라고 판단했다. 산재재심사위는 “오랜 기간 휴가를 사용하거나 휴가를 소진한 이후로도 출근한 상태에서 업무시작 전 갑자기 조퇴를 하는 등 음독 행위가 있기 직전까지 일반적인 근로자의 통상적 행위로는 보기 어려운 이상 행위를 보인 사실이 확인된다”며 “사쪽에서 신장이 작은 A씨의 손이 닿기 힘든 라인에 A씨를 배치하고, 2주마다 A씨가 수행할 공정라인을 바꿔 적응에 어려움을 겪었고 다른 직원들이 자신을 못 마땅해한다고 느껴 스트레스를 받아 왔다”고 밝혔다.
산재재심사위는 “극심한 업무상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정신적 고통으로 인해 정상적 인식능력이나 정신적 억제력이 현저히 저하된 상태에서 음독 행위를 하기에 이르렀음을 추단할 수 있다”며 “개인적인 취약성이 음독 행위를 결의하게 된 데 영향을 미쳤다거나 행위 직전에 환각·망상·와해된 언행 등 정신병적 증상에 이르지 않았다고 해서 이를 달리 볼 것은 아니다”고 판단했다.
A씨 대리인 김민호 공인노무사(노무법인 참터 충청지사)는 “굉장히 이례적인 재결”이라고 평가했다. 김 노무사는 “A씨가 장기간 휴가를 쓰고 출근하지 않는 등 사실관계는 정신적 이상 상태로 볼 수 있는 회피 반응의 일환인데 산재재심사위는 질병판정위위에서 놓쳤던 이 부분을 판단 근거로 봤다”며 “산재 판단시 법원 판례를 인용하는 경우가 극히 드문데, ‘업무와 질병간 인과관계는 의학적·자연과학적으로 명백히 증명될 필요는 없다’라는 취지의 대법원 판례를 인용해 업무상 자해행위 인정기준을 완화한 법리대로 판단한 것도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