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꾸는 건 원래 어렵다

2025-08-05     손민석
▲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실망했다”는 얘기가 터져 나온다. “빛의 혁명” 운운하며 집권한 정부가 차별금지법 등의 ‘광장의 목소리’를 배제하고 있다며 실망을 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이러려고 윤석열 탄핵 집회에 나갔나”라는 한탄까지 나오는 걸 보면 상심이 큰 듯하다. 광장에 나가 시위 몇 번 하는 걸로 세상이 바뀌리라 기대하는 걸 순진하다 타박하고 싶지는 않다. 그만큼 절박하고 절실하기에, 또 기대가 컸기에 실망을 표하는 것이리라. 하지만 세상은 그리 쉽게 바뀌지 않는다. 우리 자신이 바로 그 차별적인 세계의 일부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게 하나 있다면, 그것은 인간사회가 차별, 억압 등을 동력으로 삼아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계급의 탄생에 관한 마르크스 역사학의 설명은 단순히 생산수단의 유무로 환원될 수 없다. 예속신분제와 같은 차별적 제도는 오히려 생산력의 발전을 위해 인류사의 전개에 있어 반드시 통과해야만 했던, 필연적인 역사발전의 한 단계로 이해된다. 이때 차별, 억압 등의 근원에 놓여 있던 것이 바로 ‘가족공동체’의 “재생산 기제”였다. 자신의 가족, 자녀 등에게 더 나은 삶을 살게 해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타인에 대한 예속으로 이어졌다는 게 마르크스 역사학의 근본적인 통찰이다.

대표적인 예로 한국에서의 적서차별이 그러했다. 저명한 조선사 연구자인 송준호 교수가 보여줬듯이 조선 후기의 족보편찬 과정에서 적서의 구별은 매우 뚜렷하고 특이한 현상이었다. 족보에 이름을 기재하는데 있어 그 옆에 ‘서’를 대대로 명시해 적파와 서파의 차별을 온존코자 했던 게 조선사회였다. 서자는 죽어서도 대대손손 차별받아야 했다. 중국 족보에서는 거의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 족보만의 특징이다. 아마 신분 판정 과정에서 부계만이 아니라 모계의 혈통을 중시하는 한국 전통사회의 특징이 발현된 것으로 보인다. 족보에 적힌 그 많은 이름들 사이에는 이름 모를 ‘어머니’들의 피눈물이 흐른다.

이와 같은 차별은 양반신분이 법적으로 정해져 제도적으로 보장받지 못하고 사회문화적으로 규정되었다는 데서 비롯된다. 양반임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하는 상황에서 가장 확실한 신분의 재생산은 ‘혼인’을 매개로 한 신분상 동일성의 확보였다. ‘하자’ 없는 양반 집안을 혼인 상대로 맞이하는 것만큼 확실한 신분보장책이 없다 보니 상대집안의 모계혈통까지 따지게 됐던 것이다. 적서차별은 그 과정에서 배태된 차별적 습속이었다. 혼인상대의 모계쪽 혈통까지 뒤져 하자를 찾을 정도로 ‘재생산 기제’는 강력했다.

한국만 그런 게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후진성의 발현으로 파악하는 이들이 많지만 백좌흠 교수 등의 공동연구를 보면 카스트는 법적 제도라기보다는 양반사회의 신분제도와 같이 사회적 차별 기제에 가깝다. 이때도 문제가 되는 게 바로 ‘혼인’이다. 최소한 같은 카스트 내에서 통혼을 하려다 보니, 동일 카스트 내에서도 수백, 수천 가지의 구별이 나타난다. 예컨대 똑같은 수공업자 출신이더라도 왕족의 금세공업을 하던 카스트와, 일반 수공업에 종사했던 카스트 사이에도 차별의 선이 그어진다. 미국에 이민간 인도인들 사이에서도 카스트를 따진다고 하니 스스로를 타인과 구별하고, 더 나은 삶을 누리며 자녀들에게 물려주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얼마나 집요한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오늘날 한국에서 찾아볼 수 있는 능력주의, 부동산, 극우화 등으로 표현되는 다양한 현상들의 근간에는 남들보다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욕망을 동력으로 하는 ‘재생산 기제’가 놓여 있다. 역대 민주당 정권들은 이 ‘재생산 기제’를 무시했다가 정치적 반발에 직면했다. 최근의 주식 세제 개편안 관련 논쟁도 이런 맥락이다. 대안적 생활세계에 대한 청사진 없는 개혁정치는 정치적 반동에 쉽게 항복하기 마련이다. 청년세대를 탓할 것도, 언론을 탓할 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그 한 구성부분인 ‘재생산 기제’를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자신의 생활세계의 변혁 없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그렇기에 세상을 바꾸는 일은 원래 어렵다.

<우리는 왜 대통령만 바라보았는가> 작가 (fpdlakstp@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