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로벤스위원회, 이재명 정부에서 시작하자
손진우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장
“죽음의 일터를 삶의 일터로 바꾸고, 더는 유가족이 거리에서 울부짖는 일이 없게 하겠다”는 이재명 대통령의 말이 반갑다. 취임 이후 대통령은 산재 사망 근본대책 마련의 필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다. 얼마 전 대통령이 SPC 현장을 직접 방문해 반복되는 산재 사망 문제를 짚어낸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급기야는 29일 산업재해 근절을 위한 국무회의를 생중계했다. 이를 통해 이재명 정부가 산재 대책 마련에 확연히 다른 태세를 갖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대통령이 강조하듯, 산업재해 근본 대책 마련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이다. 대책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서는 이를 전담할 행정조직의 뒷받침도 필수적이다. 이를 두고 국정기획위원회가 행정조직 개편 방향에서 산재 사망 문제를 전담할 노동부 2차관 신설을 검토하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다양한 현안을 폭넓게 담당하는 고용노동부 산하 행정조직 편재에는 한계가 있다는 진단이다. 전문성과 지속성을 담보할 수 없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산재사망 대책이 집권 정부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져 지속성을 담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또한 근본대책 마련을 위한 사회적 논의와 공론화 과정이 선행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판 로벤스위원회’ 구성을 통해 논의가 시작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안타깝게도 국내 산업재해 예방대책은 정권 변화에 따라 접근과 해법에 큰 차이를 보였다. 산업재해를 바라보는 인식의 차이가 다른 모양새의 해법과 제도, 정책으로 나타났다.
단적으로 문재인 정부는 산업재해를 ‘사회적 재난’이라고 규정하고, ‘안전은 권리’라고 선언했다. 윤석열 정부는 산업재해는 노동자의 실수가 주된 원인인데, 왜 기업이 책임져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과도한 규제를 불어온 중대재해 처벌 등에 관한 법률(중대재해처벌법)을 손보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런 입장 변화에 따라 윤석열 정부는 산업재해 예방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야 할 노조 탄압에 골몰했고, 기업은 안전을 앞세워 노동자를 통제하기 바빴다.
이처럼 제도와 정책이 오락가락했던 것은 산업재해 예방대책 마련에 근간이 돼야 할 인식과 관점, 철학의 근원적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 차이가 사라진 것은 아니다. ‘산재는 노동자 탓’이라는 생각을 여전히 하는 이들이, 집권 초기 높은 지지율과 강력한 의지를 가진 이재명 정부의 서슬퍼런 위세에 잠시 숨을 죽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성향에 따른 산재사망 대책의 갈지자 행보를 멈추고 일관되고 지속적인 산재 예방 정책을 수립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합의가 절실히 필요하다.
영국 로벤스위원회도 우리와 비슷한 조건에서 출발했다. 산업혁명이 시작된 나라이니만큼, 산업재해가 빈번했고, 대형 재난, 참사가 잇따랐다. 그에 따른 단기처방과 법제도 난립 문제도 심각했다. 로벤스위원회는 이런 문제를 되짚는 것에서 시작했다. 노동계, 경영계, 정부, 전문가, 시민사회 등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모여 산업안전보건에 대한 근본적인 철학과 법체계를 재정립하는 데 이르렀다. 그 결과 ‘후행적 감독’과 ‘규제 중심’에서 벗어나 예방을 근간에 둔 ‘자기규율 예방체계의 정립과 책임’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장기적인 산업안전보건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물론 영국의 경험을 한국 사회에 적용하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제도의 근간이 된 철학과 사회적 논의 기반이 충분치 않은 상태에서 도입된 제도와 정책은 오히려 혼란을 초래했다. 대표적으로 ‘자기규율예방체계-위험성평가’가 그렇다. 기업은 이를 기존의 ‘자율규제’로 인식하며 규제 완화의 청신호로 받아들였다. 노조는 반발했다. 보호의 대상이 아닌 위험관리의 주체로 현장의 노사가 그 근간이 돼야 한다는 철학은 실종됐다.
이제라도 흔들림 없는 안전보건철학을 정립하는 공론장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 이를 통해 노동계, 경영계, 정부, 전문가, 시민사회 이해관계자들의 폭넓은 공감대와 사회구성원 모두의 지지를 기반으로 하는 사회적 합의가 선행돼야 한다. 이재명 정부가 산업재해 문제 해결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표명한 지금이야말로 한국판 로벤스위원회를 통해 근본 대책을 마련해 나갈 적기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논쟁을 넘어 사회 전체의 합의를 이끌어 낼 수 있는 독립적이고 포괄적인 논의 기구를 통해 ‘죽음의 일터’를 ‘삶의 일터’로 바꾸는 지속 가능하고 일관된 산업안전보건의 근간을 구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