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주의 재활성화를 위한 노동정치의 과제
이 글은 필자가 최근 일본에서 집필한 책 ‘転換期の労働政治―多様化する就労形態と日韓労働組合の戦略’(전환기의 노동정치: 다양화하는 취업형태와 한일 노동조합의 전략)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다. <편집자>
윤석열 전 대통령이 계엄령을 선언한 이후 우여곡절 속에 지난 4일 파면이 결정됐다. 이런 과정에서 민주주의는 공고화하면 다시 후퇴할 수 없는 완성된 제도가 아니라 재활성화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미완의 과정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됐다. 이는 민주주의의 후퇴가 한국에서만 일시적으로 일어난 현상이 아니라, 여러 선진국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데서도 확인된다. 민주주의의 핵심가치 중 하나는 구성원 전원이 참여해 결정하는 것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해 여러 장치들이 마련돼 있다. 하지만 주요 선진국에서 차별과 배제를 통해 지지층의 결속을 도모하고 지지를 동원하고자 하는 우파 포퓰리즘 정당이 세를 확대하고 있다. 구성원 일부를 배제하기 위한 권위주의적 정치형태가 나타나고 있으며, 실제 스웨덴의 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는 최근 민주주의 국가보다 권위주의 국가가 증가하고 있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문제 중에 노동정치의 과제를 살펴보고자 한다.
노동정치란 무엇인가
노동정치는 다양한 의미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정의하기가 쉽지 않다. 특히 최근 한국에서 노동시장 개혁을 위한 노동법 개정이 노사뿐만 아니라 정당들도 첨예하게 대립하는 쟁점이 되면서 노동정치는 노동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발전 속에 정치학에서 노동정치를 어떻게 다뤄 왔는지를 충분히 포괄하지 못한다.
자본주의 발전은 부르주아지(자본가계급)와 프롤레타리아트(노동자계급)라는 양대 계급의 대립과 투쟁 속에 이뤄졌다. 서구에서는 계급투쟁이 민주주의 규칙에 따른 경쟁으로 전환돼 그 경쟁의 형태에 따라 다양한 복지국가가 탄생했다. 따라서 서구 노동자는 노사관계에 머물지 않고 거시적 정치경제 체제 속에서 자신의 생활 안정을 추구했다. 이러한 노동자의 이익 추구와 실현은 개인 간 무한한 경쟁을 유도하는 자본주의와 모두의 참여를 이상으로 하는 민주주의의 갈등을 봉합하고 정치경제 체제를 안정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렇기 때문에 노동정치는 노동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이나 이익단체의 이익 추구로 왜소화할 수 없고, 정치경제 체제의 유지와 변화를 고찰하기 위한 중요한 연구 분야가 된 것이다.
이렇게 노동정치를 거시적 관점에서 이해할 때 국가의 역할과 노사의 권력관계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가 중요하다. 먼저 국가를 바라보는 관점은 자신의 선호를 가지고 이에 따라 강력한 정책을 주도하는 적극적 주체로 보느냐, 아니면 다양한 행위자들이 경쟁한 결과에 불과한 수동적 주체로 보느냐의 문제이다. 다른 쟁점은 노사의 권력관계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력을 제공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고 생활해야 하므로 자본가와 대등한 관계에서 협상을 하기 힘들다. 이러한 불균등한 권력관계를 보완하기 위해 노동 3권과 노동법이 형성돼 왔다. 그럼에도 여전히 노사관계를 노동이 약한 불균형한 관계로 보는 시각이 있는 반면, 이를 대등한 관계로 보는 관점이 있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에 따라 노동정치를 이해하는 다양한 접근법이 존재해 왔다. 다원주의, 코포라티즘, 마르크스주의 국가론, 권력자원론 등이 국가의 역할과 노사의 권력관계에 대한 다양한 시점으로 논쟁을 펼쳐왔다.
왜 노동정치의 전환기인가
그러나 이러한 이론들이 노동정치를 이해하던 시대와 달리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무엇보다 큰 변화는 노동 내부의 다양화다. 한국의 ‘비정규직’이라는 말은 일본 이외의 선진국에서 번역하기 힘든 단어였다. 유사한 의미로 서구에서도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 고용불안뿐만 아니라 임금 차별까지를 포함하는 불안정 노동자가 유럽에서도 큰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한국과 일본 비정규직의 보편화라고도 볼 수 있다.
불안정 노동 증가는 노사자치와 노동법을 통한 노동 보호를 무력하게 한다. 앱을 통해 일감을 받아 노동력을 제공하고 대가를 받는 것이 노동자인지 아닌지, 그리고 이들이 노동자로서 보호받을 수 있는 것인지를 다투게 된 것이다. 대리기사, 배달라이더 등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람들이 기존의 노사자치와 노동법의 사각지대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한 노동자는 노동조합에서 배제돼 노사관계로 보호받지 못해 더욱 법적 규제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만, 노동정책을 결정하는 정치과정에서도 과소대표돼 있다. 기존의 노사자치와 법적 규제의 틀에서는 불안정 노동 출현에 대응하지 못하는 것이다.
노동조합은 자본주의의 경쟁압력에 무기력해지고 있는 정부, 자본주의를 견제할 수 있는 노동조합과 이를 대표하는 정당의 약화라는 외부적 환경에 더해 노동형태의 다양화로 인한 노동 내부의 대립과 갈등까지 조정하고 대표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됐다.
이러한 노동정치의 변화와 과제는 민주주의의 불안과 무관하지 않다. 자본주의의 무한 경쟁을 제어하지 못하고 개인의 욕망이 공동체 전체의 가치를 압도하게 되면 모든 구성원의 참여로 인한 의사결정은 더욱 힘들어진다. 기후변화나 저출산 고령화라는 긴급하면서도 공통의 과제에 대해 수십억 원의 재산을 보유하는 건물주와 하루하루의 생계를 위해 고달픈 일상을 살아가는 노동자가 함께 결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겠는가. 이 때문에 사회의 미래를 함께 결정하기 위해서는 그 결정에 참여하는 구성원들의 유사한 경제적 토대가 필요하다. 이 경제적 토대가 약해질수록 유사한 물적 토대에 기반한 공통의 정체성을 대체하기 위해 소수파의 배제를 통한 차별적인 우리에 익숙해지게 된다. 자본주의의 무한경쟁과 이의 폐해가 극에 달했던 시기에 각국에서 파시즘이 나타났고, 현재에도 많은 국가에서 자국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소수파에 대한 차별과 배제를 주장하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노동정치와 민주주의의 미래는 있는가
이러한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를 위해 좌파 포퓰리즘에 기대하는 목소리도 있다. 즉 자본주의를 제어하기 위해 일부 엘리트 정치인과 이를 중심으로 한 정당의 활약을 기대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랜 역사 속에 이어져 온 지배하는 계층과 지배당하는 계층의 이분법적 체제를 정당화할 위험을 내포하고 있으며 민주주의 이념에 반할 수 있다. 좌파 포퓰리즘이 지금의 정치경제 체제의 한계를 극복하는 대안이 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지난한 과정이지만 일부 엘리트 정치인이 아니라 구성원 대다수가 그 사회의 미래를 함께 고민하고 함께 대안을 도출하고 가꿔 나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민주주의에 의한 결정이 최상의 결과를 보장하지 않고 소수의 엘리트와 전문가가 결정하는 것이 그 사회를 위한 나은 대안이 될 때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이상으로 하는 가치는 그 사회를 위해 어차피 알 수 없는 미래 속에 함께 결정하는 과정에 있다. 이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정책에 대한 결과에도 책임을 함께 질 수 있다. 이 과정을 함께 하기 위해서 구성원의 동질성과 일체감을 유지하는 것이 민주주의를 위해 필수불가결한 요소가 된다.
각자의 권리와 의견을 존중하는 다양성과 구성원의 동질성·일체감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원심력과 구심력의 긴장 속에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자본주의는 개인을 파편화시키는 원심력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민주주의를 위한 이 둘의 불안한 긴장관계를 더욱 위태롭게 한다.
사회의 다양성과 동질성 간 긴장을 유지하면서도 자본주의의 무한경쟁 원리를 제어하기 위해 주목받아 왔던 것이 노동정치였다. 노동조합이 쇠퇴하고 있기 때문에 노동정치에 대한 관심이 서구에서도 현저히 줄어든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노동정치가 전후 정치경제 변화를 이해하는 데 중요했고 현재도 이어지고 있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긴장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단기적으로 탄핵을 넘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기 위해 헌법 질서를 파괴한 세력을 단죄하고 새로운 정치시스템을 건설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와 함께 차별과 배제로 지지를 동원하는 정치경제 구조를 바꾸기 위한 노력도 함께 따라야 한다. 한국 사회는 서구에 비해 노동정치의 토대가 허약한데도 민주주의의 재활성화를 위해 노동정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노동조합은 이러한 역사적 과제 속에 자신의 존재의의를 재확인하려는 노력이 더욱 필요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