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세계, 이제는 주권자의 시간

김성호 공인노무사(노노모 회장)

2024-12-17     김성호
▲ 김성호 공인노무사(노노모 회장)

12월14일 오후 5시경, 국회의장은 윤석열에 대한 탄핵소추안 가결을 선포했다. 그 순간 여의도 국회의사당 주변을 가득 메운 군중은 환호성을 지르며, 12월3일 내란 선포 이후 12일 동안 쌓아온 분노·연대·희망을 나눴다. 집회 진행자는 탄핵소추 가결이 발표되자 아껴뒀다는 듯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틀었고, 현장을 지키던 군중은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며 추운 겨울 아스팔트에서 고생한 서로를 격려하고 지지했다. 마치 축제 현장에 온 것 같았다. 우리 노노모 회원 수십명도 역사의 현장을 지켰다.

이번 내란 사태는 우리에게 헌법적 가치를 되뇌는 시간을 갖게 했다. 헌법은 대통령과 같은 일부 정치인이 아닌 국민에게 주권이 있음을 천명하고 있다. 또 주권의 본체인 국민에게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가 있음을 확인하고, 행복할 권리를 인정했다. 윤석열 정부가 들어선 후 인간의 존엄과 행복할 권리가 무참히 훼손된 사례는 한둘이 아니다. 정부 초기인 2022년 가을에는 서울 이태원에 축제를 즐기러 나온 젊은 인파가 좁은 길에 몰리며 159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발생했다. 2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진상 규명은 요원하다. 2023년 여름에는 충북 오송에서 폭우 대처를 제대로 하지 못해 지하차도가 침수되며 14명이 숨졌다. 목적과 방향은 알 수 없는 의료개혁으로 의사 2천명 증원을 호언했지만 의료인도, 국민도 혼란스러운 의료대란을 경험하고 있다. 사교육·과학기술 등 여기저기 카르텔(이권 조직)이 있다며 예산을 삭감하고 수사의 칼날을 들이댔지만, 카르텔 실체는 확인되지 않은 채 사회적 약자에 대한 보호망만 흔들었다.

그 사이에 일터는 어땠을까. 윤석열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부터 1주 120시간 노동제를 주창했고, 취임하자 고소득 노동자의 노동시간 제한을 없애는 시도를 했다. 취임 후에는 주 최대 69시간 노동제를 준비하다 반발에 막혀 중단됐지만, 다시 4억6천만원 규모의 ‘근로시간 제도개편 대국민 설문조사’를 진행하며 노동시간 유연화 시도를 멈추지 않았다. 노동시간은 노동자의 삶과 건강에 직결되는 근본적 인권 문제인데도, 노동시간 유연화를 마치 개혁인 양 포장했다. 또 실업과 산재 같은 취약한 상황에 놓인 노동자를 보호하는 실업급여(구직급여)와 산재보험에도 손을 대고 있다. 구직급여 부정수급 비율이 1.4% 수준임에도 이를 과대 포장하고, 구직급여로 명품 가방을 사고 해외여행을 간다는 둥 ‘시럽급여’ 운운했다. 노동자, 특히 여성과 청년을 조롱했다. 또 ‘산재 카르텔’로 조 단위의 조직적 부정수급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3개월간 감사를 해도 실체를 확인하지 못했다. 정부의 악의적 호도로 실업과 산재 피해를 겪는 노동자에게 2중의 낙인과 모욕을 줬고, 인권의 최저선마저 흔들었다.

헌법에서 보장한 노동 3권에 대한 윤석열 정부의 반헌법적 태도는 그 정도가 더 심했다. 취임 직후에는 화물노동자의 안전권‧생존권 요구를 ‘북핵 위협과 마찬가지’라며 초유의 업무개시명령을 발동했다. 같은해 여름에는 조선소 하청노동자의 7년 전 삭감 임금을 약속대로 복구하라는 요구를 ‘불법 점거’로 몰아갔고, 회사는 조합원들에게 470억원의 손해배상 소송을 청구했다. 불행하게도 윤석열 정부가 노조를 때릴 때마다 하락하던 지지율은 높아졌다. 정부의 화살은 건설노동자를 향했다. 고용안정과 산업안전을 주장하던 노동자를 폭력배(건폭)로 매도했고, 공갈 협박으로 수사했다. 그 과정에서 고 양회동 건설노조 지회장이 분신 항거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터는 윤석열 정부 집권 내내 내란 상황이었다. 노동자 역시 시민이다. 한국 헌법에서 시민(국민)은 주권자다. 그러나 일터 문을 여는 순간 노동자에게는 주권이 사라진다. 주권이 사라진 진공의 일터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우리 대다수가 연관된 ‘일터’에 민주주의가 없는데 우리 사회에 민주주의가 완성될 리 만무하다. 이번 탄핵 광장에 선 노동자, 청소년, 청년, 중장년, 노년, 여성, 남성, 소수자, 장애인 등 모두가 시민이다. 이제 시민이지 못했던 공간을 시민의 광장으로 만드는 작업이 필요하다.

혹자는 이제 헌법재판소의 시간이 왔다고 한다. 아니다. 이제부터 주권자의 시간이다. 울려 퍼진 노래처럼 다시 만난 세계는 모든 공간에서 주권이 바로 서도록 만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