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대화를 다시 묻는다 ②

2024-12-09     박태주

“사회적 대화는 정부, 사용자 대표와 노동자 대표, 혹은 사용자 대표와 노동자 대표가 경제 및 사회정책과 관련된 공통의 관심사에 대해 벌이는 모든 유형의 교섭, 협의 또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말한다.”

▲ 박태주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ILO가 말하는 사회적 대화의 다양성

국제노동기구(ILO)가 내린 사회적 대화의 정의다. ILO는 자신이 각국의 노‧사‧정 대표로 구성된 사회적 대화기구일 뿐 아니라 국제적으로 사회적 대화의 실천과 확산에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여 온 단체다. 사회적 대화에 관한 ILO의 정의는 사회적 대화의 주체와 의제, 그리고 행위 양식을 가지런히 정리하고 있다. 새겨보면 흥미로운 대목들도 눈에 띈다.

먼저 ILO는 사회적 대화를 이해당사자의 거버넌스로 파악한다. 거버넌스는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적 조정양식’을 말한다(이명호, 2022). 국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결정하기보다는 사회 내에서 조직된 집단(associations)과 협의하는 것을 말한다.

ILO는 노사정 3자 주의(tripartism)를 고집하지 않는다. 노사 사이의 2자 주의(bipartism)도 배제하지 않는다. 공공부문에서는 정부가 사용자로서 사회적 대화에 참가한다. 드물기는 하지만 민간부문에서 노정 간 사회적 대화가 성립하기도 한다. 보건의료인력 확충과 공공의료 강화, 감염병 대응체계 구축 등을 축으로 보건의료노조와 보건복지부 장관이 2021년 맺은 ‘9‧2 노정합의’가 그런 예다. 우리나라에서 사회적 대화는 핵심 이해당사자 외에도 전문가나 공익위원이 참가하는 ‘확대된 3자 주의’(노사정+α)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ILO는 사회적 대화의 제도화에 대해서는 말을 아낀다. 그것이 법(한국)이나 헌법(프랑스)에 기초하는지, 상설기구로 존재하는지는 주요한 관심사가 아니다. 제도화된 틀이 사회적 대화의 성공에 결정적인 요소가 아닐 뿐더러 사회적 대화를 제도적인 틀에 가둬서도 안 된다고 보기 때문이다. 제도적인 기구가 사회적 대화를 독점하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제도로 자리를 잡으면 장점을 갖는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정부의 참가를 강제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대화의 결과에 대한 정부의 책임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 제도화는 사회적 대화의 투명성과 지속가능성을 뒷받침하며 참여 주체들의 경험과 역량을 축적할 수 있게 만든다. 제도로 자리를 잡아야 사회적 권위도 생기고 예산이나 인력의 확보도 용이해진다. 스웨덴이나 독일은 예외지만 대부분의 나라가 헌법이나 법률을 바탕으로 사회적 대화기구를 운영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행위양식과 관련해 사회적 대화가 “모든 유형의 협상, 협의 또는 단순한 정보의 교환”(all types of negotiation, consultation or simply exchange of information)을 포함한다고 했을 때 정작 흥미로운 대목은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사회적 대화로 본다는 점이다. 정보의 교환이 대화의 필수적인 출발점이긴 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인 협의나 협상으로 이어져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사회적 대화가 ‘단순한 정보의 교환’을 포함한다는 사실로 인해 사회적 대화의 개념은 한껏 넓어진다. 사회적 대화가 정부의 자문위원회와 같이 노사가 이해당사자로 참여하는 정부위원회까지 포함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 위원회는 위원회·심의회·협의회 등 명칭을 불문하고 행정기관의 소관 사무에 대해 자문에 응하거나 조정·협의·심의 또는 의결을 담당하는 합의제 기관이다(윤태범, 2014). 그렇다면 노사 동수가 사회적 대화의 필수적인 전제가 아니라는 사실도 확인할 수 있다.

ILO의 개념을 재해석해야 하는 지점도

ILO가 내린 사회적 대화의 정의가 유용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유럽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만큼 우리 처지로선 한계도 보인다. 대표적인 것이 사회적 대화가 단체교섭을 포괄한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임금인상 자제는 인플레이션 극복을 위한 소득정책의 형태로, 또는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오랫동안 유럽 사회적 대화의 중심이었다. 네덜란드의 바세나르협약(1982)이나 아일랜드의 국가회복 프로그램(1987)도 그러한 예에 속한다(우리나라에서도 김영삼 정부시절 ‘노-경총 사회적 합의’라는 이름으로 임금억제를 추진한 바 있다). ILO는 ‘2022년, 사회적 대화에 관한 보고서’를 내놓으며 “단체교섭은 코로나19로 악화된 불평등이 초래한 고용과 소득의 위기를 완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며 그것을 ‘사회적 대화의 심장’이라고 부른다(ILO, 2022).

사회적 대화에 대한 이러한 용법은 전국 혹은 산업 차원에서 이뤄지는 단체교섭과 노사(정) 협의 사이의 경계를 긋기 어려운 유럽 노사관계 제도의 특징을 드러낸다(Fashoyin, 2004). 하지만 단체교섭과 노사정협의가 법‧제도적으로 엄격하게 분리될 뿐 아니라 단체교섭이 사실상 기업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우리나라의 상황에서 단체교섭을 사회적 대화에 포함하기는 어려워 보인다(이는 사회적 대화와 관련해 유럽에서 발달한 개념인 ‘정치적 교환’이나 ‘중앙집권적인 노사단체의 존재’ 등에 대해서도 달리 해석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자세한 것은 후술한다).

두 번째로는 사회적 대화를 ‘경제 및 사회정책과 관련된, 노사정 사이의 공통 관심사’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는 점이다. 노사가 참가해야만 사회적 대화라고 부르는 것도 아니다. 사회적 대화는 노동 관련 의제를 넘어 우리 사회의 제반 갈등적인 사안에 적용됨으로써 ‘국정 운영의 거버넌스’(이호근, 2022)로 발전한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가 그런 예다. 탄소중립기본법에서는 “기후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모든 이해당사자들이 의사결정 과정에 동등하고 실질적으로 참여”하는 것을 ‘기후정의’라고 규정하고 있다.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나 국가교육위원회, 최근 의료대란과 관련해 설립된 여야의정협의체도 마찬가지다(사회적 의제를 협의하기 위해 학계와 시민사회, 그리고 주민조직 등이 광범위하게 참가하는 것을 사회적 대화와 구분해 시민적 대화(civil dialogue)라고 부르기도 한다).

‘느슨하고 열린 체제’로서의 사회적 대화

사회적 대화는 반드시 노사정이 참여하는 형태를 취하는 것도 아닐 뿐더러 제도화된 기구에 한정되는 것도 아니다. 노동 의제에 국한될 필요도 없으며 협상이나 협의를 생략한 채 정보의 교환에 그칠 수도 있다. 그것은 주로 정부의 정책 과정과 국회의 입법 과정에 개입하지만 민간 주체들이 자신들의 의제를 논의하는 것을 배제하지도 않는다. 최근에는 국회판 사회적 대화가 논의되고 있기도 하다(국회의 입법과정 자체가 사회적 대화를 포함한다).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아니더라도 우리 주위에서는 이미 다양한 형태로 사회적 대화가 이뤄지고 있다. 여기에는 비제도적인 형태의 사회적 대화는 물론 정부위원회와 같은 자문기구도 포함된다. 정혜윤(2024)에 따르면 노동조합은 594개의 정부위원회 가운데 10% 내외에 참여하고 있다. 노사 중심성의 수위는 기구에 따라 다양한 층위를 보이지만 사회적 파트너들은 이미 폭넓게 정책 형성이나 입법과정에 개입하고 있는 셈이다. 사회적 대화가 노동의 영역을 넘어 진행되기도 한다. 경사노위를 사회적 대화와 동일시할 이유는 없다.

결과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느슨하고 열린 체제로 정의할 필요가 있다는 사실을 말한다. 이때 ‘느슨하다’라는 것은 단체교섭과는 달리 의결(합의)보다는 자문이나 협의가 우선된다는 것을 말한다. ‘열려 있다’라는 건 모든 관련 주체들의 참여가 허용돼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고 모든 관련 주체들의 참여가 필수적인 전제는 아니다. 사회적 대화가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 데다 그것이 협상보다는 협의가 중심이고 단순한 정보의 교환까지 포함한다면 더욱 그렇다. 이 진술은 민주노총에게도 해당된다.

전 경사노위 상임위원 (tjpark07@hanmail.net)